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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13. 2019

기차에서 만난 그리즐리 3

단편소설



 곰은 보기보다 어느 정도 이곳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했다. 곰의 얼굴에 표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면 표정은 있지만 그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터득 터득하는 기차가 질주하는 소리와 기차가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는 소리와 가끔 깊은 잠이 들어있는 사람들의 피곤한 코골이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알래스카가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땅이 얼어버릴 듯했던 추위가 요즘 들어 예전 같지 않아서요. 이대로 가다가는 20년 후에는 알래스카가 변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모든 나라에도 영향을 줍니다. 실은 겨울에 좀 따뜻하면 어때. 그럼 좀 더 깊게 잠들지 않아도 되고, 다른 동물들은 먹이를 못 찾아서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라고 하겠지만 말이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겨울에 굉장히 춥지 않으면 뭐랄까, 땅의 깊은 바닥이 시기에 맞지 않게 풀들을 밀어 올려서 나중에 풍성하게 되어야 할 시기에는 다 말라죽어버린다거나 병이 들어 버립니다. 그대로 죽어 버린 동물의 사체 때문에 대지는 균을 가득 짊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죠. 병들어 죽은 사체를 먹은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로 앓다가 그대로 픽 쓰러지고 말죠. 땅 밑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땅 밑에서도 여러 가지 활발한 활동이 지층 간에 이루어지고 있는데 겨울에 혹독하게 추워야만 그 지층의 움직임도 둔해졌다가 다시 겨울이 오기 전까지 움직이며 여러 가지 웅덩이라든가, 새로운 물이라든가, 그런 자연 생성물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겨울이 아주 춥다고 할 수 없어졌어요. 우리들은, 그러니까 알래스카의 동물들은 긴급회의를 했습니다. 결론은 알래스카의 겨울을 혹독한 추위로 지켜주는 돌이(그리즐리는 양 손으로 돌의 크기와 모양을 만들며)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몇 년 동안 지구에 살고 있는 동물들의 도움으로 사라진 돌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그 돌은 바로 여기, 이 나라로 흘러들어 왔더군요."


 그리즐리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물병은 작은데 물은 계속 나왔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돌이 이곳에 머무른다면 이곳은 반대로 겨울이 너무나, 어마어마하게 추워져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불편하겠죠. 교통수단이 지금보다 더욱 열을 내며 달릴 것이고 무엇보다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도 춥습니다. 1년이 거의 고통스러운 추운 날들의 연속입니다. 겨울이 되면 생각 이상의 추위가 이 나라를 덮칠 겁니다.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10년 후? 20년 후에는 겨울에 집 밖으로 아예 나가지도 못할 정도의 추위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리즐리는 그의 앞으로 한층 다가와서 말했다. 눈에 보이는 그리즐리의 눈동자는 아주 맑았다. 매일 아침에 거울을 통해서 보는 자신의 눈동자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그리즐리의 말을 듣고 조금은 공감이 갔고 전적으로 동감했다. 환경오염에 대해서 그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심각한 문제임은 확실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돌이라니?    


 "그리즐리 베어 씨?"


 "네, 함고동 씨, 말씀하시죠. 당신은 참 좋은 분이십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라 부르지 말라고 하려다가, 또 저의 이름은 함고동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런데 아까 신문을 저에게 보여주신 것은 뭣 때문에?"


 그리즐리는 자신의 옆에 놓인 신문을 들고 거짓말 같은 손가락으로 이것 말입니까, 하며 신문을 펼쳐 보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함고동 씨께서 기차의 차표 값을 잘 못 알고 계신 것 같아서 요즘의 기차표 값을 알려 드리려고 신문 날짜를 보여드린 겁니다. 지금은 83년도거든요. 개의치 마십시오." 그리즐리는 신문을 다시 접어서 옆에 두었다. 그의 시선은 신문을 향했다. 지난달에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총 40억 달러의 경제협력 지원에 합의를 했다는 내용도 보였다. 그는 등을 의자에 푹 기댔다.    


 지금이?    


 우동 값부터 이상했다. 열차 내부의 분위기도 이상했고 차장도 이상했다. 그는 요즘 휴대전화기로 기차를 예매하는 시대인데 자신은 기차역에서 표를 구한 것뿐이다. 휴대전화를 그리즐리에게 보여주려고 주머니를 뒤졌지만 휴대전화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먹은 우동이 소화가 되지 않고 자꾸 올라오려고 했다. 곰 하고 대화를 하다니, 이건 정말이지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즐리 몰래 자신의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 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다.    


 '돌' 이라니.     


 무슨 돌이 여기로 흘러 들어왔다는 말인가. 그는 돌을 떠올렸다. 그리즐리가 양 손으로 가늠했던 만큼의 돌을 머릿속에서 나열했다. 그저 돌멩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 돌 때문에 알래스카가 재난이 오고 한국에는 빙하기가 온다는 말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뺨을 때렸다. 역시 아팠다. 이것이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관념에 고개가 숙여졌다. 몸이 순간적으로 불쾌하게 느껴졌다가 어떤 좌절감이 들었다. 좌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얼마 큼의 크기인지 분간도,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리즐리는 고개를 숙인 그에게 다가와서 손인지 앞발인지 그것을 그의 어깨에 올리고 괜찮으냐고 물었다.     


 괜찮을 리가 있나.    


 그렇지만 곰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곰을 바라보았다. 곰의 눈은 아기의 눈동자처럼 검고 반짝였다. 가까이서 보는 곰의 얼굴은 정말 컸다.


 "그리즐리 베어 씨, 당신은 그래서 어디까지 가시는 거죠?" 그가 곰을 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곰은 그가 괜찮아 보였는지 앞발을 그의 어깨에서 내리고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다음 잠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열차 안이 유난히 추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뚜껑이 없는 오픈 기차를 타고 백 킬로미터가 넘는 속력으로 겨울의 밤을 달리는 것처럼 추웠다. 그는 몸을 오들오들 떨었고 양팔의 팔짱을 꼈고 몸을 말았다. 추위가 얼굴을 아프게 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히터에 문제가 생겨서 밖의 추운 공기가 실내로 유입되어 몹시 추우니 수리를 할 동안 따뜻하게 옷을 껴입고 있으라는 방송이 나왔다. 기차는 점점 가속도가 붙는 듯했고 기차 안은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훅훅 나왔고 뾰족한 얼음이 날아와서 몸을 찌르는 것처럼 추웠다. 냉기가 냉동 가스실처럼 흘렀으며 입이 덜덜 떨려서 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마저 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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