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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14. 2019

기차에서 만난 그리즐리 4

단편소설




 "함고동 씨, 당신은 지금 몹시 추워하고 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의 품에 안기십시오. 전 온몸이 털로 뒤덮여있어서 추위는 막을 수 있습니다. 히터를 고치는 동안 이쪽으로 와서 기대십시오. 그리 따뜻하지는 않더라도 춥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즐리는 양팔을 살짝 벌렸다. 그는 내심 고민이 되었다. 곰에게는 동물의 냄새가 심하게 날 것인데 그 비린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이며, 비린내가 난다고 손가락으로 코를 막으면 무례하게 보일 것이다. 게다가 곰인데 자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주둥이가 툭 튀어나와서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저 입안에는 연어도 순식간에 찢어버리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을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나 같은 것은 한입에 물어뜯을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나를 먹기 위해 곰이 하는 연극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열차 안은 너무 추웠다. 냉동고에서 얼어 죽는 사람이 가끔 뉴스에 나왔는데 그 기사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의 사고가 돌아가기 전에 먼저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체감하는 추위는 태어나서 난생처음이었다. 극심한 고통이 동반되는 추위였다. 발가벗고 얼음 바위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처럼 너무 추웠다. 고추는 얼어서 짜부라 들었고 치아는 서로 부딪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는 그리즐리를 어렵게 고개를 들어서 쳐다보았다. 고개도 잘 움직이지 않았다. 왜인지 그리즐리는 웃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몸을 움직여 그리즐리의 품에 들어갔다. 품에 안기는 순간 칼바람 같은 몹쓸 추위가 단절되어 버렸다. 그리즐리의 품은 오랫동안 방에 불을 지핀 아랫목처럼 따뜻하고 아늑했다.


 아아 이것이 진짜 안온감이다. 무엇보다 포근했다. 냄새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의 몸을 감싸는 그리즐리 털의 감촉이 유난히 따뜻했다. 약간 거친 듯 털은 하나하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그의 연약한 몸뚱이를 데워주었다.

 "어떻습니까, 그런대로 괜찮지 않습니까?" 라며 그리즐리는 웃었다. 그는 품에 안겨 고개를 들어 위로 올려다보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함고동 씨, 그러면 다시 이어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저는 그 돌이 있는 곳에 가고 있는 것입니다. 돌은 봉화와 안동을 지나 청량산의 청량사 밑에 축융봉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 돌을 가지고 제가 있는 알래스카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뿐입니다. 단지……." 하고 그리즐리는 틈을 두었다. 기차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기차를 타면 으레 터득 터득하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멍하게 터득 터득하는 소리에 맞춰 고개를 흔들거나 거기에 맞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리즐리가 열차에 타고 언젠가부터 그 터득 터득 터득 터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지 돌은 아주 거대한 괄태충이 가지고 있는데 싸워서 그 돌을 가져와야 한다는 겁니다."    


 괄태충? 이건 또 무엇인가.


 그는 괄태충에 대해서 또 잠시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야 사전적 의미의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거대한 괄태충이란 무엇일까.    


 "그 돌을 알래스카에서 거대한 괄태충이 꺼내갔던 것이더군요. 어째서 이 나라의 축융봉 근처에 옮겨다 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괄태충에게서 그 돌을 빼앗지 못한다면 곧 여름에도 두터운 외투를 입고 다닐 날이 곧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리즐리는 고개를 숙여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즐리의 눈동자는 정말 검고 맑았다. 나이가 많다고 했지만 눈동자는 이제 태어난 지 일, 이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는 새끼 곰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함고동 씨, 당신도 저와 함께 같이 돌을 되찾아오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그리즐리의 뜬금없는 부탁으로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겨우 내려갔지만 소화가 되지 않던 우동이 다시 식도 근처까지 왔다.


 “하지만 전 내일 거래처에 들러야 하고 그 일 때문에 먼 곳에서 밤차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전 싸움이라면 엉망……." 기차는 히터를 고쳤는지 열차 안의 대기는 히터에서 나오는 깨끗하지 않은 더운 공기가 차가운 공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그리즐리의 털 속이 무엇보다 아늑하고 따뜻해서 좋았다. 모성애가 느껴지는 그 털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면 정말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을 것이다. 정해져 있는 규범 같은 것은 그리즐리의 털 속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꿈속을 거니는 듯 확정 지어지지 않는 추상적 꿈이 거대한 그리즐리의 품 안, 털 속에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리즐리의 품속에 마냥 안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계속 품속에 있다가는 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괄태충과 싸움이라니, 그는 할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싸움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아주 찌질 한 인생이었다. 싸움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 몸으로 터득한 바였다.     


 하지만 때때로 살면서 싸움을 해서 이기고 싶은 인간이 있었다. 죽어버렸음 하는 인간들 말이다. 그런 인간들과 당당하게 싸워서 이기고 싶지만 싸움은 그와는 멀리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싸움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몸에 힘이 몽땅 빠져나가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큰소리로 욕이라도 듣게 되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자리에서 무서워 오줌까지 쌌다. 그것 때문에 마음에 두고 있던 정혜마저 나를 외면했다. 그렇게 살아왔다.     


 고여 있는, 맛 떨어져 버린 썩기 직전의 물처럼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았고 인정해주지 않았다. 싸워야 할 자리가 있으면 그대로 피해 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그는 그리즐리의 품에서 나와 맞은편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기차는 터득 터득(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몸이 리듬감 있게 흔들렸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창밖은 어둠뿐이라 가끔씩 멀리 보이는 알 수 없는 불빛만이 눈에 들어왔다. 터득 거리는 소리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았다.


 "함고동 씨 어떻습니까? 같이 싸워주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정말 뿌듯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당신 나라의 미래를 조금 구했으니까 말이죠."


 "조금이라구요? 그럴 바에는……."


 그리즐리는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부비더니. "네, 그렇습니다. 뭐랄까 자연재해나 지구가 망해 가는 것을 함고동 씨가 조금은 미뤄 두는 것에 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자연을 조금씩 파괴만 할 뿐입니다. 하늘을 자꾸 가리고 땅 밑을 끊임없이 파헤칠 것입니다. 인간 위에 인간이 누워 자고 그 위에 또 인간이 누워 잠듭니다. 이러한 반복을 순차적으로 매일매일 하다 보면 언젠가는 위험한 상황이 도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반대편에서 소수지만 그런 현상의 위험성을 알리고 투쟁을 하며 환경이니, 자연이니, 출산에 대하여 소리를 높이는 부분이 있기는 하겠지만 개발이라는 명목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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