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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y 11. 2021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450

15장 6일째 저녁

450.


 어린 시절 깊어진 겨울의 추운 밤, 방에는 작고 미미한 빛을 내는 노란 전구가 있었다. 노란 전구의 빛은 더 이상 온기도 없었고 밝지도 않아서 쓸모가 없다고 어머니가 버리려 했지만 없으면 허전했다. 그때 허전함은 마음의 허전함이었을까. 노란 전구는 온기를 잃어버렸지만 그 빛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조금씩 차올랐다. 미약한 노란빛은 어딘지 모르게 마동의 손을 잡아주며, 괜찮아, 괜찮아하고 말을 해주었다. 달이 전구를 대신하기 전에는 전구에게서 꽤 많은 의미를 전달받았다. 희미해진 노란빛은 온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마동은 미미하지만 노란빛이 무작정 좋았다. 두 손으로 감싸 보아도 노란빛의 전구는 이제 전구라고 할 수 없는 모양새와 빛을 지니게 되어 버렸다. 마동은 온기가 식어버린 노란빛의 전구를 매일매일 바라보며 만졌다. 전구가 지니는 본질적인 면에서 벗어남을 느꼈다. 마동의 불안정한 마음이 안정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퇴색한 노란 불빛의 전구 덕분에.


 그렇지만 쓸모없어진 노란 전구는 미미한 빛과 함께 쓰레기통에 끝내는 버려졌다. 지금은 그때 버려진 퇴색한 노란 전구의 빛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단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마음의 안정이 필요할지는 몰랐다. 어쩌면 마음의 안정보다 안정에 다가가려는 그 무엇이 필요할지 몰랐다. 그저 문득 이질적인 하늘을 보니 퇴색된 빛의 노란 전구가 떠올랐을 뿐이다.


 마동의 눈앞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자줏빛 해무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불러냈다. 자줏빛 해무 속에 감춰진 무서운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마동은 두려웠다. 마음이 불안정하고 떨렸다. 아주 맑고 투명한 바다 위에서 보트를 타고 있다가 보트가 멈추었을 때 바닷속은 액정 속의 브라운관을 바라보듯 너무 깨끗하다. 깨끗함이 지나치면 서서히 무서움이 다가온다. 바다의 깊이가 눈에 드러나게 된다. 알 수 없는 바닷속이 주는 공포와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다. 10미터가 넘는 깊이의 바다가 환하게 다 보인다. 그 속은 너무 확실하게 깨끗하여 물고기가 한 마리도 살고 있지 않다. 그런 바다에 빠지는 상상을 한다. 꿈을 배회하듯 물속에서 몇 분을 견디다가 맑고 투명함이라는 것이 서서히 목숨을 앗아 가버린다. 바다가 지니는 일반론의 투명한 차원을 넘어선 깨끗함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예상외로 얼음처럼 차갑다. 차갑고 투명한 날카로움은 가장 먼저 눈을 아찔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뒤로는 ‘혹시’가 조금의 ‘희망’도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비현실적이고 무서운 깊이로 나를 끌고 가 버리고 만다. 굉장히 깨끗한 바닷속에는 불사의 너구리가 있었고, 철탑 인간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존재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보이는 저 큰 자줏빛 해무가 쉬르리얼리즘 사진을 보는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마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현실 사진 속의 세계에는 현실에서 유린된 우리의 삶이 아주 잘 가꾸어진 화단의 꽃처럼 보였다. 그 속에는 질서에 의한 가지런한 규정이 아닌 뒤죽박죽인 비규정적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마동은 쉼 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스렸다.


 모든 것을 끝내고 조화와 균형을 잡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준비운동은 이미 끝냈다. 수영장에 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자줏빛 해무 속으로 마동은 자신을 집어넣기만 하면 편안한 물속에서 물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유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된 생각을 굳혔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자. 분명 생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마동은 그 희박한 가능성을 잡고 싶었다. 희망과는 다른 ‘가능성’에 손을 내밀었다.


 쿠르릉.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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