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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n 29. 2021

런던 팝에서 15

단편 소설


15.


 걸음걸이도 교양이 묻어있는 여성이 걷는 모습이었고 웃을 땐 늘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렇지만 술을 잘 마셨고 힘도 세었다. 고등학교에서 만나 소위 멤버들과 시내에 있는 ‘올 댓 재즈’에서 맥주를 마셨다. 두려운 것도 없이 교복을 입고 올 댓 재즈에서 맥주와 소시지를 씹어 먹으며 이야기를 했다. 소시지라고 해봐야 요즘처럼 좋아 보이는 모양의 소시지가 아니라 줄줄이 비엔나 같은 소시지였다. 우리는 줄줄이 비엔나를 사랑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학교 밴드 부였고 내가 그들의 틈에 끼었는데 치론이도 내 옆에 늘 었었다.


 우리는 올 댓 재즈에서 밥 딜런과 롤링 스톤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엘튼 존은 봉크를 할 때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학교에는 태영이라는 녀석이 있었는다. 그 녀석의 얼굴은 버브의 리처드 애쉬 크로포드를 닮아서 여학교의 팝을 좋아하는 여학생들의 환심을 샀다. 당연하지만 태영이는 그게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팝이나 영국 밴드에는 관심도 없었다. 치론이는 가요를 좋아해서 이런 대화에 끼지는 못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올 댓 재즈에서 술을 마시다가 단속이 뜨면 우리는 주방의 구석에 쪼그리고 가만히 숨어 있었다. 주방에는 소시지가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냄새가 났고 양파의 분자가 변형되는 냄새도 진동했다. 나쁘지 않았다. 집에 있는 주방과는 또 다른 환경이 주는 매력이 깃든 냄새였다. 프라이팬이 많은 선반 밑에 우리는 쪼그리고 앉아서 들키면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키득키득거렸다.


 내 얼굴 바로 옆에 치론이의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었는데 치론이가 숨을 쉴 때마다 숨 냄새가 났다. 다른 녀석들처럼 역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향이 났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 아이들의 숨 냄새에는 입 냄새와 사춘기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도사리고 있었지만 치론이는 그렇지 않았다.


 올 댓 재즈에는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연주곡이 흘렀는데 주인집 딸내미가 늘 틀었다. 주인 딸내미는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고 밴드부 중에 상혁이도 피아노를 했는데 같이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누나였다. 우리는 자석에 끌리듯 올 댓 재즈에 와서 맥주를 마시고 줄줄이 비엔나를 씹어 먹으며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 입이 큰지, 에어로 스미스의 스티브 타일러의 입이 큰지, 배철수의 입이 큰지 이야기를 했다.


 밤 열 시가 넘어가면 손님들이 대체로 빠졌고 대학생이었던 누나는 스필만이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 20번을 틀어놓고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같이 맥주를 마셨다. 쇼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고 그 쇼팽을 연주한 스필만에 대해서도 들었다. 사람이 종이처럼 찢겨 나가고 건물이 무너지는 가운데 피아노로, 피아노 연주를 했던 스필만이었다. 스필만은 그렇게 90년을 살았다. 우리는 말없이 눈을 감고 스필만이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 20번을 들었다. 누나는 단발이었고 늘 교포 화장을 하고 있어서 화장을 지운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여름 방학에는 올 댓 재즈에 와서 일을 도와줬는데 가슴이 유난히 커서 반팔 티셔츠는 늘 타이트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가슴이 흘러내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교과서의 표지가 바뀌었고 고3이 되어서도 수업시간에는 졸다가 머리가 책상에 박는 소리가 크게 났고 워터 덕과 올 댓 재즈를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문학부였던 기철이는 학교 문예지에 죽음에 관한 글만 실었다가 교무주임에게 불려 가서 한 소리를 들었고 대들다가 화학 선생님이었던 아보가드로에게 개 맞듯이 맞았다. 기철이의 허벅지는 무지갯빛으로 물들어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자연스러웠지만 내려가는 모습은 이상하여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걸음걸이라고 치론이가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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