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뜨거운 볕을 피하는 것 밖에 할 게 없다.
아침에 엘리베이터를 타기 시작하면 펼쳐서 읽는 소설이 있다. 그걸 주차장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가면서 읽는다. 그러면 대략 두 페이지 정도 매일 읽을 수 있다. 걸음은 아주 느리게 걷는다. 영화의 한 장면을 슬로모션으로 돌리는 것처럼 걷는다.
여름이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천천히 걷고 있으니 바닥에 내려온 햇빛이 복사열이 되어 올라왔다. 그때 옆으로 여고생 두 명이 나를 앞질렀다. 그녀들도 걸음이 아주 느리다. 그 걸음걸이에는 더위와 함께 공부에 대한 무게 때문에 느린 것이다. 두 명의 여고생은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데 시간을 보낸 탓에 팔뚝과 다리가 하얗다. 한 명은 가방이 무거운지 앞으로 맸다. 마치 아기를 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들의 걸음걸이는 나보다는 빠르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느리다.
하얀 티셔츠에 체육복 반바지가 그녀들의 패션이다. 멋보다는 공부하는데 초점이 맞는 스타일이다. 나를 앞질러 나보다 조금 빠르게 걸어가는 그녀들이 하는 대화는 수학에 관한 것이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가 맞겠지만 그래도 여고생 두 명이서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그 녀석이나 그 오빠 이야기가 아니라 수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공부와 무더위가 그녀들의 어깨 위에 올라타 무겁게 짓누르는 게 보였다. 등이 약간 굽고 걸음걸이에서 의욕은 도통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여고생 특유의 밝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약간은 높은 톤과 그 시기만의 말투에서 나타났다. 그녀들은 학교로 가는 길로 가고 나는 주차장으로 가면서 그녀들과는 헤어지게 됐다.
나는 나대로 주차장으로 가는데 노인정 앞의 그늘이 진 평상에는 오전부터 더위를 피해 아버님들이 나와 있다. 나는 아침마다 이곳을 지나간다. 천천히. 책을 읽으며. 그러면 앉아서 무료한 아버님들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걸 알 수 있다. 아버님들은 어머님들과 다르게 인원이 많으면 말 수가 오히려 더 적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목소리가 큰 아버님이 나타나서 그 자리를 평정한다. 그러면 곁가지로 소심한 아버님들이 한 마디씩 한다. 그렇게 하면 비로소 아버님들이 하나의 주제로 열띤 대화를 한다.
아버님들이 '소. 심.'하고 매일 오전에 이곳에 우르르 나오는 이유는 집에 앉아서 에어컨을 틀어 놓고 티브이를 보는 것이 눈치가 보이는 것이다. 퇴직하고 난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아버님들은 소심해지고 아침을 먹자마자 집에서 나와 이곳에 모인다. 그렇게 소심한 아버님들이 모여있기에 담배를 피우거나 서로 분위기를 보며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며 서로를 쳐다본다. 그러다가 걸걸한 목소리를 지닌 한사랑 산악회의 김영남 회장 같은 아버님이 오면 그제야 아파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발전된 땅의 이야기, 가족들 이야기를 거쳐 정치 이야기에서 모두가 정점을 찍는다.
그 사이를 책을 읽으며 사막 거북이처럼 천천히 지나가면 아버님들이 죄다 쳐다본다. 노인정 앞에 매일 나오는 아버님들의 뒷모습은 바닷가에 늘 나오는 노인들의 뒷모습과는 또 다르다. 바다를 바라보는 노인들의 뒷모습에는 일종의 세계가 도사리고 있는데 노인정 앞의 아버님들의 뒷모습에는 내리쬐는 볕을 피하는 것밖에 지금 할 게 없다는 듯 더위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렇게 소심한 아버님들이 모여서도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다가도 걸걸하고 분위기를 이끄는 한 명의 아버님이 딱 나타나서 허리춤에 양 팔을 올리고 분위기를 끌어내면 아버님들은 또 신나게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928 [바다를 멍하게 바라보는 노인들의 등에는 세계가 있다]
경제학자이자 도덕 철학가인 애덤 스미스의 책을 보면 대략(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구절이 있는데 인간은 대체로 이타적이라 누군가의 기쁜 소식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보통 우리 인간은 질투가 많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고, 또 우리는 늘 그런 것을 느끼며 살고 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는 이타적인 마음이 가득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좋은 점을 보면 칭찬을 아끼지 않기도 한다. 설령 그것이 지금 행복하지 않은 나의 생활을 더 나아지게 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좋은 점을 보면 칭찬을 한다.
아버님들이 앉아 있는 곳을 아침마다 지나가야 한다. 나의 습관 때문에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은 늘 책을 읽으며 간다. 그러다 보면 아버님들은 일제히 나를 본다. 그리고 한 아버님이 한 마디를 한다. 걸어가면서도 공부하네, 참 보기 좋네. 같은 말을 한다. 그러면 옆의 아버님도 한 마디 거든다. 나를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듣는 칭찬이 나는 나쁠 리가 없다. 그러면 고개를 들어 목례를 살짝 하고 지나간다. 그럼 한 동안은, 걸걸하고 분위기를 이끌어갈 아버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버님들은 서먹하지 않게 소싯적 공부를 한 이야기 같은 것들을 할지도 모른다.
그럼 오늘도 내 마음대로 선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