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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ug 25. 2021

최 흑 오 12

단편 소설


12.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내 내부의 오토 장치는 스위치를 내려 방호벽을 만들어서 그 안쪽으로는 안전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의미로 진공관의 형태로 만들어 놓는다. 방호벽의 밖에서는 불꽃놀이처럼 만개와 함께 무화되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방호벽을 사이로 그 안쪽에서 나는 진공에 몸을 감싸인 채, 그 모습을 그저 일별 할 뿐이다. 그렇게 조금 지나면 불꽃놀이는 끝이 나고 평소와 똑같다. 잊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라는 건 일어나고 만다. 그 일이라는 것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지만 진실을 마주한다는 건 겁이 나기 때문에 내 내부의 어떤 장치는 작동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방호벽은 더 거대해졌다. 적이라는 건 다름 아닌 내 내부의 방호벽을 만들어버린 나였다.


 "자기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준 상처보다 자기가 받은 상처의 총량이 훨씬 많다고 생각을 늘 하고 있는 거 같아. 그렇기에 자기 같은 사람이 이렇게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거야." 어느 날 그녀와 술을 마시고 그녀가 술에 취해 나에게 한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그 당시에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떠한 역사적인 일들도 동 시간 속에 있으면 알아채지 못한다. 어찌 되었던 나는 그녀에게 내가 제대로 해야 할 말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 밤 9시가 되었다. 건물의 다른 가게들이 정리를 하고 문을 닫고 인사를 하고 빗속을 뚫고 집으로 갔다. 불이 하나씩 탁탁 꺼지기 시작하니 건물은 겨우 숨을 쉬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둠이 온 세계를 덮쳤고 거기에 비까지 내려 건물은 마치 고립의 자세를 지니는 것 같았다.


 최흑오라는 여자는 오지 않았다. 밤 9시가 넘어서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오지 않으려는 것일까. 그때 지하주차장에서 들리던 그 소리가 들렸다. 쥐들의 소리였다. 일반적인 쥐들이 내는 소리라고 할 수 없는 기이한 공명의 소리가 들렸다. 영혼을 갉아먹는 어둠의 소리였다. 가게 안에 앉아있는데도 지하주차장의 그 소리가 자글자글 들려왔다. 2층의 모든 가게는 전부 문을 닫고 퇴근을 했고 로비의 불은 꺼졌다. 붉은 눈동자의 쥐들이 내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와서 나는 그만 가게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를 빼는 것도 겁이 나서 건물의 입구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다.    


 그날 밤, 나는 몹시 이상한 꿈을 꿨다. 최흑오라는 여자와 잠을 자는 꿈이었다. 선글라스의 그 여자가 어째서 내 꿈에 나타났는지 알 수 없다. 최흑오라는 여자는 꿈속에서 계속 이건 꿈이 아니에요,라고 말을 했다. 선글라스의 여자는 옷은 다 벗었지만 선글라스는 벗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여자와 섹스를 하는 건 어쩐지 이상했다. 그것이 설령 꿈이라고 해도 기이하기만 했다. 밖에는 비가 내려요,라고 최흑오는 그렇게 말을 했다. 옷을 다 벗은 최흑오는 방의 불을 끄기를 바랐다. 꿈이지만 정말 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 등이나 허벅지에 그 상처가 가득했다. 날카로운 것에 물린 상처가 몸 여러 곳에 있었다. 선글라스의 최흑오는 눕지 않았다. 나를 눕히고 여자가 내 위에 올라와서 섹스를 했다. 선글라스를 낀 얼굴 양 옆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늘어져 움직임을 말해주고 있었고 입술이 약간 벌어졌고 그 사이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꿈이지만 최흑오라는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 손끝으로 그녀의 가슴에 있는 상처를 느꼈다. 도돌도돌 올라온 살갗이 마치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살갗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자의 상처를 손끝으로 느낄수록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하려다 만 것, 내가 확실하게 해주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에 관한 것들이었다. 익숙하지만 고통이 되어 결국 그대로 아물어 상처가 된 것들이었다. 나는 최흑오와 섹스를 하면서 괜스레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가 제대로 어루만져 줘야 할 행동이 빠져 있다는 것도 알았다. 여자의 피부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존재로만 알고 있는 사람의 피부처럼 느껴졌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여자도 눈물을 흘리는 거 같았다. 선글라스를 쓴 채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최흑오라는 여자의 눈이 보고 싶었다. 강렬하게 여자의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모니터로 본 여자의 눈동자는 채도가 빠진 것 같은 아주 기이한 색을 지니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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