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야기
김밥은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내려준 축복 같은 음식이다. 나 같은 인간이란 음식을 먹을 때 귀찮은 음식을 몹시 싫어하는 인간을 말한다. 상 위에서 지지고 볶고 끓이고 굽고. 이 힘든 일을 하면서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다 같이 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먹지만 내가 먼저 저런 귀찮은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하지는 않는다. 집에서 해 먹는 것도 귀찮고 힘든데 밖에서까지 잡고 뜯고 해야 한다니 맙소사다.
그런 나에게 김밥은 세상의 빛과 같은 음식이다. 나는 오이를 좋아한다. 그리고 김밥을 좋아한다. 그래서 김밥에 오이가 들어가면 소고기가 들어간 김밥보다 더 좋다. 김밥에 오이가 들어가 있단 말이야,라고 임금님 귀처럼 어딘가에 대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을 지경이다. 김밥이라는 음식이 좋은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귀찮지 않다. 일일이 굽고 뒤집어야 하는 삼겹살보다, 쌈을 싸서 먹어야 하는 쌈밥보다, 자르고 살을 발라서 양손을 다 써야 하는 홍게, 대게 같은 갑각류보다 귀찮지 않아서 훨씬 좋다.
김밥이 눈앞에 나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갖추었기에 그저 손으로 하나씩 들고 입으로 넣으면 된다. 김밥은 멀티를 가능케 하는 음식이다. 김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고 아이패드 따위를 만지작 거리는데도 어설프지 않다.
그 김밥 할머니는 나의 그런 점을 알고 있다. 80대로 보이지만 팔십 몇 살인지는 알 수 없는 김밥 할머니가 있다. 김밥 할머니는 김밥을 손수 만들어, 손수 만든 것 같은 묘한 짐 꾸러미에 담아서 사무실마다, 상점마다 돌며 김밥을 판다. 김밥 할머니는 늘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 불쑥 문을 열고 들이닥친다.
이봐요, 할머니 막 그렇게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라고 해야 하지만 할머니는 유순한 눈동자와 굽은 등을 무기로 나에게 다가와 짐 꾸러미 속 김밥을 보여준다. 으앗 참기름의 향이 비어져 나온다. 김밥 할머니의 김밥은 달랑 두 종류다. 야채김밥과 참치김밥. 김밥 전문점처럼 다양한 종류의 김밥이 있지 않다. 에게, 고작 야채김밥과 참치김밥이다. 잘라주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주로 참치김밥을 사 먹는 모양이다. 나에게 느닷없이 왔을 때는 늘 야채김밥이 많이 남아있다. 사실 나는 참치김밥보다 야채김밥을 선호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오이가 들어간 김밥을 원하지만 오이는 금방 상하기 때문에 할머니는 오이를 넣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면 오이를 넣는다. 오이가 들어가지 않으면 나는 김밥을 사 먹지 않겠노라며 다짐을 하고 또 다짐했다.
김밥 할머니가 문을 열고 어김없이 다가온다. 할머니가 다가오면 애써 사지 않겠다는 표정을 하고 시선을 피하지만 김밥 할머니는 김밥을 들어 보이며 나에게 권한다. 순간 공기 중으로 퍼지는 꼬숩은 냄새와 금방 말아서 왔는지 탱글탱글한 김밥의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확대기처럼 확대된 채로 눈에 들어온 오이의 뒤 꽁무니.
하지만 나는 이미 결심을 했다. 입안에 아무것도 없지만 마치 입안에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는 시늉을 하며 턱과 입을 마구 움직였다. 놀랄 정도로 나의 연기는 수준급이다. 진즉에 연기 쪽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너무 놀랍다. 배우가 되어도 손색이 없다. 바로 이런 게 생활연기라는 거다. 배우 놈들아.
이 정도면 김밥 할머니는 그냥 나를 지나쳐 갈 것이다. 깜빡 속을 것이다. 그때 김밥 할머니는 김밥을 내 얼굴 앞에 내민다. 오이가 눈에 들어왔다. 김밥 할머니의 머리는 나보다 한 수 위다. 이 참을 수 없는 욕망.
김밥 할머니는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김밥과 함께 된장국을 보온병에 담아 와서 종이컵에 부어서 건네주었다. 된장국에는 시래기가 두드려 맞고 죽은 듯 푹 데쳐져서 된장과 어우러져 있다. 다른 것이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마시면 몸이 녹아내린다. 푸슈.
겨울에는 달랑 종이컵 하나에 마시는 된장국은 정말 사람을 애간장 태운다. 얄미운 된장국이다. 그리고 얄미운 김밥 할머니다. 그렇다고 김밥 할머니에게 한 컵 더 부어 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물론 더 달라고 하면 김밥 할머니가 부어주겠지만 그런 말을 쉽게 꺼낼 수 없게 하는 분위기를 김밥 할머니는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된장국, 냄새나고 주면 누가 좋아할 것 같은가 보군, 김밥은 원래 된장국 없이도 잘 먹었어. 흥.
나는 김밥을 먹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 이미 종이컵을 코앞에 내민다. 아아 거부할 수 없는 된장국 냄새. 아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오이가 들어간 김밥. 된장국 한 컵. 아아.
김밥 할머니가 만 야채김밥은 참 맛있다. 김밥 안의 야채들은 김밥 안에 돌돌 말려 들어가기 전에 미리 무슨 짓을 해 놓은 모양이다. 야채 각각의 맛이 살아있으면서 서로가 잘 어울렸다. 부딪히지 않고 입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앙상블이 입으로 느껴진다면 바로 그것이다. 김밥 주제에 그것이 가능하다니 욕이 나올 것 같다.
김밥 안에는 김밥에 딱 필요한 야채만 들어있다. 난 본디부터 김밥이라는 음식을 좋아하는 인간인 것이다. 어떤 음식이든 김에 돌돌 말아 싸 놓으면 맛있어했다고 전해 들었다. 김밥 안에 단무지만 들어있어도 난 잘 먹는 그런 인간이다. 이런 인간의 특징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김밥 할머니가 파는 김밥에는 남들이 싫어하는, 잘 먹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오이가 들어있는 김밥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오이를 넣으면 그날 만든 김밥은 빨리 다 팔아치우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처해진다. 하지만 할머니는 머리가 비상한 건지 오이가 들어간 김밥이 팔리지 않으면 내 앞으로 와서 무기를 드러내고 김밥을 내민다.
문제가 있는데 김밥 할머니에게 한 번 김밥을 사면 김밥 할머니는 매일 그 비슷한 시간에 느닷없이 밀어닥쳐서 김밥을 내밀기 때문에 김밥을 구입하는 행동을 끊어야 할 땐 끊어야 하는데 이 머리가 좋은 김밥 할머니는 오이가 잘 보이게 내 앞에 내민다는 것이다.
맛있는 김밥이라도 매일매일 먹는다는 건 힘든 일이다. 누구나 알고 있고 모두가 그걸 피하고 있다. 게다가 나는 천오백 원 하는 김밥을 한 줄만 사지는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난 항상 두 줄을 구입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한 줄만으로 모자라서 내가 두 줄을 구입하는지 알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김밥이란 딱 한 줄만 먹으면 포만감이 몰려온다.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김밥도 칼로리가 놓아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줄만 먹으면 적당함을 넘어서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어쩌다 누군가와 야외에 갔을 때 그 누군가가 김밥을 싸오면 참 난처하고 난감하다. 그날 저녁은 집으로 가서 소화제를 먹어야 할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도 그 누군가는 김밥을 그렇게나 많이 먹이고(어째서 자기는 먹지 않을까), 그렇게나 사육하는 개처럼 먹이고는 저녁에 스파게티를 먹기를 강요한다. 게다가 야외에서 먹은 김밥은 맛도 지지리도 없는 김밥이다. 소화제가 세상에 개발되지 않았다면 난 정말 배가 펑하고 터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김밥은 정말 기기묘묘하여 집에서 김밥을 만들라 치면 한 줄이나 두 줄만 만들 수는 없다. 김밥이란 그렇게 생겨먹었다. 김밥이란 태생부터 그런 식인 것이다. 김밥은 어째서 한 줄, 두 줄로 불리는 것일까. 음식만의 고유 조사 격인 한 그릇, 두 그릇도 아니고 한 단, 두 단도 아니고 한 포기, 두 포기도 아니다. 한 줄, 두 줄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물 같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운 평일에 먹는 한 줄짜리 야채김밥은 정말 맛있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소풍날 찬합을 가득 채운 김밥이나 산더미처럼 쌓인 뷔페의 김밥은 오 분만 쳐다봐도 소화가 안 된다. 그 자리에서 토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두 줄을 김밥 할머니에게 구입하는 이유는 한 줄만 구입하기 미안해서 한 줄을 더 구입하는 단순한 이유다. 김밥 할머니는 고단수다. 내가 그리 구입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용의주도하게 행동을 해도 알아차렸다. 낭패다.
김밥 할머니 할머니가 다가온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책상 위에 약을 늘어트려 놓는다. 그리고 나는 아픈 척 눈을 감고 으으 소리를 내며 의자에 기대어 있다. 큭큭 이건 완벽에 가깝지 않은가. 연극 배우는 저리 가라다. 지난번과는 다르다. 누가 봐도 김밥 같은 건 먹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이다. 김밥 할머니는 아무런 말도 없이 김밥을 내 앞에 내밀었다.
꼬숩은 냄새, 그리고 된장국. 눈에 보이는 싱싱한 오이. 나는 배우는 절대 되지 못한다.
아니 장사를 이렇게 무례하게 하다니. 아무리 김밥 할머니가 나이가 많지만 “김밥 사세요”라든가 “김밥이 오늘 잘 말렸어”라든가, 암튼 아무 말이나 해야 했다. 하지만 김밥 할머니는 방치된 시골집 마당 같은 얼굴을 하고 내 앞에 김밥을 쓱 내밀었다. 나는 김밥 따위는 이제 먹지 않아요!라고 말해야 했지만 야채 김밥 두 줄이요,라고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친절하게 그렸다. 게다가 시답잖은 말까지 해버렸다. 야채김밥 말고 채소 김밥은 없나요?
결국 오늘도 김밥 할머니의 김밥을 사고 말았다. 실은, 이건 비밀이지만 나는 김밥을 매일 사 먹는다. 무슨 음식이든지 매일 같은 걸 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김밥 할머니가 내미는 김밥을 매일매일 먹는다. 탱글탱글한 밥알이 입안에서 룰루랄라 한다. 김도 분명 싸구려 중국산일 것이다. 입안에서 오이가 씹힌다. 아 상쾌하다. 정말 맛있다. 내 입맛은 참.
무슨 재료를 썼든 간에 그 재료들은 싸구려 저질 중국산이지 싶다. 김밥이 입안에서 노래를 부르듯 움직였다. 그런 움직임이 온몸으로 퍼지면 나는 전자랜드 앞의 인형처럼 양 팔을 옆으로 죽 뻗어 춤을 추었다.
오늘은 김밥 할머니가 단무지를 덤으로 주고 갔다. 젓가락도 주지 않고 단무지를 어떻게 먹으라는 건지. 이런 건 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김밥을 입에 넣고 단무지를 씹어 먹는다. 단무지가 김밥에 비해 양이 너무 적어서 앞니로 조금씩 배어 물었다. 톡톡 끊어서 먹는 단무지의 맛은 김밥의 맛을 극상시킨다.
김밥 따위는 집에서든 편의점에서든 어디서든 사 먹을 수 있단 말이다. 굳이 표정 없는 김밥 할머니에게 사 먹지 않아도 된단 말이다. 하지만 어쩌다 어딘가에서 사 먹는 김밥은 ‘어쩌다’ 맛이다. 어쩌다, 맛이 뭔가? 그건 나도 모른다. 골목에 밟히는 작은 그루터기의 맛, 해안가 모래 속에 숨어있는 돌멩이의 맛. 뭐 그 정도로 해 두자.
배고플 때 맛없는 음식으로 배 채우는 것만큼 기분이 나쁜 건 없다. 배가 불러도 김밥 할머니의 김밥은, 그러니까 야채김밥은, 오이가 들어간 김밥 할머니의 김밥은 인정하기 싫지만 맛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기분이 나쁘다.
난 지금 한숨을 쉬며 김밥 할머니에게서 구입한 야채김밥을 의자의 등받이에 푹 파묻혀 먹고 있다. 주지 않아도 되는 단무지를 아껴가며 한 손에는 김밥을, 한 손에는 단무지를 들고 야무지게 먹는다. 김밥을 베어 물었다. 내 표정이 조금 밝아졌나? 단무지를 살짝 베어 물었다. 아아 이 기분 좋은 만남. 남아있는 단무지의 양과 김밥의 길이를 재가며 먹는 맛이 있다.
그리고 어비 게일이 나온 ‘리틀 미스 선샤인'을 볼 것이다. 영화 속 데보츠카 노래를 들으며 나는 여행을 떠난다. 김밥 여행을. 무려 오이가 들어간 야채김밥을 먹으며.
그리하여 오늘의 선곡은 아직 꼬꼬마 아비 게일이 나와서 너무나 신났던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ost다. 데보츠카의 곡으로. 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