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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Feb 21. 2022

뿌연 잿빛의 바닷가

바닷가에서 6



2월 말의 다른 지역은 눈이 오고 한파라고 떠들썩한데 이곳은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의 날이다. 포근해서 좋지만 먼지가 두텁게 껴서 뿌연 바닷가라 좋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런 바다를 나는 사랑한다. 이런 바다를 자주 볼 수 없어서 사랑하고, 이런 바다는 그림 같아서 사랑한다.


맑고 쨍하다면 성능 좋은 카메라로 찍어 버린 사진 같지만 이런 바다는 수고로움이 잔뜩 깃든 그림처럼 보인다. 이런 날 바다에 나와 저 멀리 수평선을 보면 늘 뱀처럼 보인다. 천경자의 ‘생태’를 보면서 뱀에 대해서 한 번 적었다.


[뱀은 바다와 닮았어. 멀리서 보는 바다는 꼭 뱀과 같아. 팔다리가 없어도 불평 한번 안 하잖아. 늘 어딘가 숨어 지내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현재에도 증오와 미움을 잔뜩 받고 있지]


[매혹적이며 은근하지. 몸을 이루고 있는 색감은 인간의 인공적인 붓질로는 표현해내지 못할 거야. 보고 있으면 그 컬러의 매혹에 빠져들 거야. 우울할 때 키리코의 그림을 보며 깊은 우울을 느끼고 나면 괜찮아지듯 팔다리 없이도 고개를 들고 어디든 스르륵 가는 뱀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


여기에 서서 바다를 보면 인간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김소연 시인의 말처럼, 사랑의 달콤함을 알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길다. 뱀처럼.


하지만 사랑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인생이 터무니없이 짧다. 뱀처럼.


바다도 그와 비슷하다. 저 수평선과 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지만 가서 닿으려면 우리의 삶은 아주 짧고 몹시 미약하다. 10년 전 오늘의 뿌연 날에도 바다는 그대로였다. 20년 전에도 그대로였고 50년 전에도 그대로였을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자주 변하고, 종종 화를 내고, 가끔 사랑을 할 뿐이다.



오늘의 선곡은 조지 마이클의 파더 피겨 https://youtu.be/m_9hfHvQS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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