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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13. 2022

바람이 불어오면 17

소설


17.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답을 찾는 것 같았다. 역시 틈이 길었다.


 “글쎄,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신은 우리를 미워하나 봐.”


 “신을 탓하지 마세요. 신은 우리에게 관심조차 없을지도 몰라요.”


 침착한 그녀는 침착하지 못하게 맥주를 마셨다.


 “만약, 제가 당신을 포기할 수 없다면요?”


 “견뎌내지 못할 거야.”


 “저 생리가 멎었어요.”


 여름의 밤은 짧았다. 그리고 무거웠다. 또 무더웠다. 공기는 질척였고 숨을 쉬면 그 무게가 목 안으로 훅 밀려들었다. 계절은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계절은 한 번 왔다가 한 번 죽어버리고 사라지고 나면 어김없이 다시 태어났다. 배고픈 탐험가가 탐험을 위해 앞으로 가듯 계절은 어느새 몸에 닿았다가 저만치 멀어졌다. 방학은 끝이 났고 자취촌을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들도 사라지고 학생들은 대학가를 떠들썩하게 했고 담배를 피우고 책을 읽으며 캠퍼스를 누비거나 강의를 듣고 서로를 비난하거나 사회를 욕했으며, 현 기득권과 국회의원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잔디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경비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학교는 격렬한 몸부림을 겪은 뒤라 어떤 욕이나 술자리도 작은 강아지의 움직임처럼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 과정에 로맨스가 있었고 동아리들은 선술집이나 호프집으로 모여들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댔다. 술집의 한쪽에 문과생들이 앉아서 한창 릴케와 니체에 대해서 이야기 중이었다. 둘 다 태생이 같고 실존주의였다. 그럼에도 니체와 릴케의 세계는 달랐으며 문과생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 신랄하게 토론 중이었다.


 “백색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자신과 빗대어 말했잖아. 우린 릴케를 닮아야 해.” 이런 말들이 오고 갔다. 도무지 왜 니체와 릴케가 저토록 토론의 대상이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저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누구나 타인이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일들이 나에게는 중요하다. 담배연기는 학생들의 소란스러운 말소리와 함께 술집의 대기에 흩뿌려졌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배신당한 어떤 이는 술집 바닥에 고개를 숙이고 구토를 했으며 일행은 그 학생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서 기운을 내리고 등을 두드렸다. 등을 맞은 학생은 아프다고 웅얼웅얼거렸지만 등을 두드리는 사람도 술이 취해 힘 조절이 어려웠다.


 한 번의 파도 같았던 시위를 빼면 작년의 이맘때와 학교 분위기는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고 앞으로도 그대로일 것이다. 단지 그녀만 야위었다. 여름 방학이 끝이 나고, 나는 타 지역의 집에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는 자취방은 그 냄새를 유지한 여름날을 견뎌왔다. 나는 옷도 몇 벌 되지 않았다. 더블 테크에 카세트테이프를 넣었다. 하지만 부서졌던 더블 테크는 억지로 수를 해서인지 잘 나오지 않았다. 핑크 플로이드의 ‘타임’이 듣고 싶었지만 더블 테크의 버튼만 만지작거렸다. 웅장하게 디잉, 디잉하며 시작하는 그들의 형용할 수 없는 음악을 듣고 싶었다. 그들의 음악을 듣는 다면 시간이 그대로 맞을 것만 같았다.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봤다. 천장의 벽지 무늬가 어쩐지 좀 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일 것이다. 눈을 흐리게 하고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마치 무늬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다. 구름이 흘러가듯이.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학교의 생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조금 눈치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선배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의상하고 건축에 대해서, 술집의 테이블에 앉은 문과생들이 니체와 릴케에 대해서 떠드는 것 못지않게 떠들었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늘 겉돌고 있다는 것을 나도, 그녀도, 선배도 알고 있었다. 단지 누구도 겉도는 이야기라고, 그러니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 사실 역시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방 안에서 책을 읽는 게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인 거 같아”라며 선배는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호탕했고 걸걸했다. 계절의 바람이 한 차례 몰아쳤다. 도심 속에서는 그걸 잘 알 수 없지만 자취촌에는 쓸쓸한 가을바람의 냄새가 일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외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기말고사 기간에 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았다. 나는 건축사 수업만 A학점을 받았고 정작 중요한 구조역학이니 설계, 설비나 공법에 관한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졸업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째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들뿐일까. 기말고사는 산발적으로 시작해서 산발적으로 끝나기 때문에 먼저 끝낸 학과생들은 자취촌을 떠나서 긴 겨울을 따뜻한 곳에서 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자취촌에서 따뜻하게 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대비를 했다.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자취촌을 떠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빠져나갔어도 자취촌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학생들로 하여금 작은 세계가 이루어졌다. 나도 겨울이 되면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자취방을 떠나 집으로 간다. 냉방이 전혀 되지 않아 여름방학에 집으로 간 것처럼.


 기말고사 시작되기 며칠 전 나는 ‘숲’에서 그녀와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거나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계란말이를 앞에 두고 소주잔만 비웠다. 그녀의 작고 차가워진 손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며 손으로 그녀의 슬픔과 아픔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거나 술을 마시거나 했다. 늘 환하게 웃고만 있던 그녀가 그날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모습은 안타까웠고 연민스러웠다. 나는 그 안타까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해서 나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영어로 된 노래만 흘러나오던 숲에 장국영의 노래가 나왔다. 촉촉함을 넘어선 레슬리의 목소리가 숲에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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