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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12. 2022

바람이 불어오면 16

소설


16.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마음에 남아있는 불편하고 불안하고 꺼끌꺼끌한 찌꺼기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을 떠나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계단도 깔끔하게 청소가 잘 되어 있었지만 담배 냄새가 미미하게 배어있었다. 그 냄새가 오점처럼 계단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하나, 그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지금은 그 하나의 위로에서 벗어난 위로가 필요했다. 사과나 부탁은 필요치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가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발을 한 발 디뎠다. 3층의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려고 하는데 위층의 계단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일그러지고 짜부라진 목소리가 그 사람의 목을 거쳐 입을 통해 힘겹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평소에 들을 수 없었던 그의 목소리를 향해서 걸었다. 조용하게 한 층 더 올라갔다. 계단의 난간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발가락 끝에 힘을 주어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조용하게 계단을 밟았다. 밑에서 올려다본 그녀는 잠시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4층의 계단참의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고 누군가가 그의 입술을 빨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은 그의 사타구니를 더듬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지만 입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얇은 틈으로 새어 나오는 바람소리 같기도 했고 이어서 빠래를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녀가 생각하는 정합성에서 완벽하게 분리된 소리였다. 불온한 소리, 그것이었다. 그 소리는 그녀가 지금껏 그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까끌까끌하고 이상한 소리였다. 그의 앞에서 그의 사타구니를 더듬고 있는 사람은 분명 그와 함께 일을 하는, 나이가 좀 더 많은 직원이었다. 두 사람은 현장에 나갔다가 들어왔는지 회사 점퍼(여름용 반팔)를 입고 있었다. 상대방은 그의 회사 상사였으며 일전에 그가 그녀에게 소개를 시켜준 적이 있었다.


 “이봐, 인사해. 우리 회사 과장님이야. 아주 멋있으신 분이지. 아내분도 무척 미인이시고 따님도 너무 귀여워. 예쁜 꼬마 숙녀를 위해 산 곰인형이야.”


 그녀는 대책 없이 다리에 힘이 풀렸다. 다리가 풀어지면서 무릎이 접히고 쿵 하는 소리를 냈다. 그와 과장은 놀라서 그녀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와 과장의 눈과 마주친 그녀는 자신이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와서, 보지 말아야 할 광경을 목격했기에 뒤에 취해야 할 행동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마음속에서 빨리 건물을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모든 의식의 세포들이 일제히 빠져나왔다. 나와서 앞만 보며 달렸다. 시야각이 60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 딱 그만큼만 보였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밤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사람들은 여름밤의 열기를 맥주로 식히고 있었다. 이미 술에 취한 이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들리지도 않는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술집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들어차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들의 표면적인 모습에서 전부 하나씩 안고 있는 고민이나 걱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들 즐거워 보였다. 웃음을 한가득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은 페인트를 쏟아부은 듯 진실이 왜곡된 석양이 드러났다. 붉은색을 보니 그녀는 가슴에서 피가 나오는 것 같았다. 그때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그동안 꽤 많이 흘렸음에도 처음 흘리는 눈물처럼 마구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봤지만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날 늦은 밤, 그녀의 방으로 그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그녀의 방에서 마주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그에게 커피를 끓여 주었고 그는 조용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방도 그의 방처럼 덥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래된 선풍기가 두 시간째 더운 바람을 쏟아내며 머리를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여름밤의 더운 공기는 그들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선풍기가 자아내는 프로펠러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의 늦은 밤, 이른 새벽의 시간에 그와 그녀는 그녀의 작은방에 앉아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등을 보이며 침대에 팔걸이를 하고 앉아있었고 그는 회사의 여름용 점퍼, 아까 그녀가 봤던 옷차림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맥주는 없을까?”라는 정적을 깨트리는 그의 말에 그녀는 방안 구석의 작은 냉장고에서 캔 맥주 두 개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는 캔 하나를 따서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그가 건네는 맥주를 받아 들었다. 받아 든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녀의 떨리는 손을 본 그는 마음이 더욱 무거웠고 더웠다. 정적은 마치 이 방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려는 듯 존재를 두 사람에게 확고하게 심어주었다.


 “난 그동안 부서진 남자였어. 나도 날 모르겠어. 입으로 나오는 그 어떤 단어의 조합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아. 많은 곳으로 부서진 내 몸은 여러 개로 분리되어서 이쪽 공간에서 저쪽 공간으로 바람에 날려가듯이 가버려 그곳에서 다시 재조립되어 버린 듯해. 조립이 되면서 뭔가 제 틀에 끼워지지 않고 팔 부분에 어깨가 맞춰지고 무릎 부분에 발목이 끼워 맞춰진 기분이야. 나도 설명할 수가 없어. 막상 너를 대할 때면 이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는 현재 나의 모습에 적응하려고 하고 있어. 마치 도시로 나온 용암이 서서히 도로를 잠식하듯이 말이야. 내가 아닌 모습인 것 같지만 바뀌어 가는 내 모습이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더욱 무거운 침묵이 그들의 틈새를 꽉꽉 메웠다.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나에게 닥칠 줄은 나도 몰랐어. 나도 어딘가 몹시 아프거나 불편한 사지를 지니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 모를 거야. 제어가 되지 않아. 설사 제어를 한다고 해도 그건 최선이 될 수가 없어.”


 그 말에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순간 그녀는 조금 움츠리는 듯 보였지만 이내 다시 조용히 어깨가 떨렸다. 어깨로 전해지는 그 사람의 체온이 그리웠지만 이질적인 손바닥처럼 느껴졌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나도 잘 모르겠어. 나도 혼란스러울 뿐이야. 벌어지고야 말았다는 것이지. 좀 더 너에게 일찍 말했어야 했지만 나도 겁이 났어. 이해해 달라고는 못하겠어. 받아들여야 해. 방학의 끝이 다가오고 겨울이 오면 입대를 해야겠지. 지금은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아. 언젠가 네게 말을 하려고 했어. 단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야. 정체성에 대한 생각의 골이 깊어질수록 힘이 들었지만 좀체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아니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해도 도달하는 곳은 정해지지 않다는 것뿐이었어.”


 “어떻든 끝은 늘 참혹하군요.”


 맥주가 그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선풍기의 바람소리와 함께 방안에 울렸다.


 “불안했어. 그런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을 때 설마라고 생각을 하고, 그 욕구와 방향성, 희열이 조금씩 마음에 들어차면서 점점 불안해졌아. 불안을 누르면 누를수록 더 큰 불안이 내 마음에 천을 드리우는 거야. 이해 못 해줘도 할 수 없어. 널 힘들게 한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을 해.”


 “전 당신을 정말 사랑했어요.”


 “나 역시 지금도 다름없이 널 사랑하고 있어. 그것에는 전혀 변함이 없어.”


 그녀는 좀 더 소리가 나게 울었다. 눈물은 그가 마신 맥주만큼 나왔다. 선풍기 바람소리는 그녀의 우는 소리에 리듬감을 실어 주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침묵을 더 길게 만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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