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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21. 2022

바람이 불어오면 25

소설


25.


 “아가씨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에요? 언제 오시는 거죠? 왜 아가씨만 이 큰 집에 혼자 두게 했어요”라고 묻는 순간 그녀의 노래를 끝이 났다. 마치 가위로 종리를 자르듯 생각할 겨를도 없이 노래가 뚝 하고 끝이 나버렸다. 정적 속에 또 다른 정적이 그 공간에 내려왔다. 이질적인 정적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가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나도 옷을 입었다. 옷은 다 말라 있었다. 내가 입는 옷의 속도에 비해서 훨씬 빨리 그녀는 옷을 입었다. 기네스북에 도전해도 될 만큼 빨랐다. 옷을 다 입고 일어서 있는 그녀는 내게서 조금 떨어져서 다시 자세를 잡고 섰다. 그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내가 손을 들어서 바닥에 이리저리 쓸어 보았을 때 나타나던 내 그림자에 비해 그녀에게는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눈이 멎었는지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빛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역시 창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그림자가 소멸된 곳이었다.


 그림자가 없는 곳에 그림자를 끌고 나는 들어와 버렸다.


 “마치 라우리의 그림 같군요.” 나는 말했다. 나는 그의 그림을 좋아한다. 삭막하고 표정 없는 거리와 멀리 보이는 공장의 굴뚝과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로 하늘은 늘 어둡다. 무엇보다 그림 속,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림자가 소거되어 있다.


 ‘맞아요, 어쩌면 당신이 있는 이곳이 라우리의 그림 속인지도 모르겠어요. 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이 그림 속의 한 곳인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당신은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해요. 아버지가 오시면 저나 당신이나 무사하지 못해요. 당신은 이곳에 와서는 안 되는 그림자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에요. 여기는 식량이 늘 모자라요. 마땅한 저장 창고도 없어요. 아버지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에요.'


 그녀가 입을 다물고 말을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싫어요, 전 가지 않을래요. 내가 있는 곳에 가봤자 어차피 어딘가에 도달하지도 못해요. 무서워요.”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안 돼요. 당신은 가야 해요. 가서 지켜줘야 해요. 그녀 몸의 한 부분에 결핍이라는 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그 꽃이 활짝 필수록 그녀의 미래와 희망이 조금씩 잠식되어가요. 꽃이 화려하게 피면 그녀의 몸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질지 몰라요. 어서 가서 당신은 그녀의 결핍을 막아주세요.’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를 생각하고 싶지만 그녀를 떠올리면 당연하게도 선배의 모습이 내 시야를 가로막았다. 난 계속 싫다고 했다. 고집을 부렸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 상황에서 울음이 왜 터져 나오는지 그런 내가 싫었다. 선배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끼어들 자리는 애당초 없어! 라며 나는 울부짖었다. 어째서 나 같지 않게 말을 해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결론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거예요. 당신은 나에게 멀어져 가려고 내 앞에 나타난 거죠?”


 ‘당신은 임계점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어느 순간엔가 그녀는 내 앞으로 와서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침착하게 그녀는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엄지로 눈 밑을 쓱 문질렀다. 눈물은 그녀의 엄지를 통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엄지손가락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한데 어째서, 어쩌자고 슬픔을 잔뜩 지니고 있는 걸까. 손의 온기가 다시 닿으니 잠이 쏟아졌다. 잠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졌다. 나는 잠들지 않으려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서글픈 모습의 미소를 짓고 내 앞에 서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잠이 순식간에 휘몰아치는 광풍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불어 닥쳤다. 나는 잠에 끌려가지 않으려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모습을 놓치기 싫었다. 점점 그녀의 모습은 희미해져 갔다. 이대로 잠이 든다면 분명 그녀를 놓치게 된다. 나는 필사적이었지만 수마는 거대하고 강력했다. 그녀의 손이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소리는 입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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