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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25. 2022

바람이 불어오면 29

소설


29.


 오후 한 시가 넘어서 자취방 앞에 도착했다. 창문을 열어놓고 나온 듯했는데 창문이 닫혀있었다. 마당을 지나 자취방으로 들어가니 누군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니 누워있던 누군가의 몸이 자동적으로 일어났다.


 “이제 오는 거야? 어디 갔었는데? 방은 왜 이렇게 추운 거야? 이런 추운 방에서 잠을 잤던 거야? 책을 읽으며? 아르누보?”


 그녀였다. 그녀가 내 침대에서 모로 누워 깜빡 잠이 들어있었다.


 “하나씩 물어봐줘요. 뭐부터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내 말에 다시 한번 초승달 같은 미소를 만들었다. 저런 웃음을 평생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초승달 같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지만 아름다운 것은 곧 소멸한다. 미소 속에는 권태와 자조적인 타박이 엿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무서워서 고개를 돌렸다. 안타까웠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래? 어디 갔다 왔어? 밖에 눈 오는 거 봤지?”


 “네, 새벽에 눈을 떴어요. 눈이 저절로 떠졌어요. 창밖을 보니 눈이 펑펑 내리기에 그만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서 좀 돌아다녔어요. 나도 모르는 새 꽤 멀리까지 가버린 바람에 이제 들어오게 됐어요.”


 그녀는 내가 하는 말의 단어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집약적으로 기록하는 듯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떠져 눈을 보러 갔구나.”


 “네.”


 “눈 내리는 거 좋아하는구나.”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억지스럽게 미소를 만들여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이 무안해할까 봐 미소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더 크게 웃었다. 웃음에 빠져들면 안 되는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글쎄, 환경미화원 아저씨들과 군인들은 싫어하지 않을까.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라며 그녀는 입을 막고 소리를 내어서 웃었다. 나의 웃음은 그녀의 웃음에 비해 보잘것없었지만 그녀의 웃음이 나의 웃음을 이끌었다.


 “아직 식전인 것 같아서 같이 밥 먹으려고 데리러 왔다가 그만 침대에 누워 버렸네. 잠깐 잠든 것 같았는데 꿈까지 꿔 버렸지 뭐야. 아마 침대가 편했나 봐. 보기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거든. 잘 개진 이불도 마음에 들었고, 얼마 만에 깊게 잠들었는지 몰라.”


“선배는…….”라는 말에 그녀는 다른 말로 대답을 했다.


 “나 여기서 잠깐 잠들면서 꿈을 꿨어. 무척 신기한 꿈이었어. 곰팡이 같은 칙칙한 느낌인데 배경은 또 달랐어. 어쩐지 뜨거운 여름의 해변에서 차가운 기분 말이야. 어떤 건물 같은 곳인데 아마도 개량 사찰 같은 곳이었나 봐. 선명하지 않아. 뿌연 장면이 펼쳐졌을 뿐이야. 칙칙하지. 내가 어떻게 그곳까지 갔던 것인지 떠오르지 않아. 꿈이라 가능했나 봐. 꿈은 늘 그런 거이니까. 꿈속이 현실과 다른 점은 압도적으로 고요하다는 거야. 필요한 소리만 꿈속에 있어. 버스 소리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껌을 씹는 소리는 들리지 않아. 고공의 고가다리를 지나고 여러 대의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궁극적인 공허가 펼쳐진 높은 건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도달했어. 그리고 기도를 했어. 기도를 하는데 누군가 내 뒤에 와서 서 있는 거야. 하지만 뿌옇게 보였어.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었어. 분명한 건 그는 아니었어. 꿈속의 그 손이 내 볼을 만져주었는데 선명하지 않아. 꿈속이라고 하기엔 그 사람의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 간절하다는 거야.”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놀랐다. 나는 방금 전까지 차가운 눈 속에서 따뜻했다. 그녀 덕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망설였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연대를 가졌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꿈속의 같은 곳으로 이끌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고 믿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생각 속으로 서로 끌어당기는 힘 같은, 특수한 무엇인가 실재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꿈이었어. 그 때문인지 아니면 나 자신 때문인지 나는 소멸되어가는 기분이 들어.”


 나는 분명히 그녀의 꿈속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꿈속으로 들어가 그녀가 기도를 하던 곳에서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나는 지금도 내 손에 남아있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확실하게 모든 것이 기억이 났다. 그녀는 나처럼 선명하게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장막이 걷히면 망막으로 내 모습이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당신의 얼굴을 만져준 사람이 접니다. 나라구요! 그 간절함을 담아서 당신의 볼을 어루만졌다고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인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슈퍼 주인의 말대로 나는 그녀에게 엉망진창인 말이라도 해야 했다.


 “전 잘 모르겠어요. 길을 걷다가 무엇인가 밟았다는 기분이 들어서 보면 굵은 벌레가 밟혀서 죽은 거예요. 몸뚱이는 쪼개져 터져 나갔고 즙은 흘러내리고 날개는 바들바들거렸어요. 다리도 다 떨어져 나가고 없어요. 벌레는 이미 죽음을 향해서 가는 거예요. 벌레는 이제 돌이길 수가 없어요. 전 그 벌레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는 다시 발을 높이 들었다가 고집스럽게 밟아요. 그럼 고통이 덜하겠지. 이렇게 된 데는 감성적이지 말아야지 해요. 그렇지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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