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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26. 2022

바람이 불어오면 30

소설

30.


 나는 그녀에게 무엇이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언제나 헛소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녀 앞에서는 늘 그렇다. 그녀는 일어나서 내 양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에 갖다 대었다. 나는 막걸리의 냄새가 올라올까 봐 입술을 다물었다. 두 입술의 통합은 짧은 찰나 붙었다가 떨어졌다.


 “밥 아직 안 먹었지? 우리 밥 먹으러 갈까?”


 그녀의 말에 나는 그러자고 했다. 아직 뱃속에는 라면이 막걸리와 함께 헤엄치고 있었다. 밖은 눈부셨다. 빛을 받은 소금처럼 찬란했다. 자취촌은 새하얗게 눈으로 덮여있었고 학생들이 소년화 되어서 신나게 눈을 던지며 자취촌의 겨울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눈은 정말 모든 풍경을 똑같게 만들었다.


 눈이 오는 풍경.


 12월의 외국 달력 같은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웸의 ‘라스트 크리스마스’처럼 말이다. 그녀는 나에게 조금 멀리 가서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역시 그러자고 했다. 그녀는 엄마를 따라나서는 다섯 살 아이 같은 나를 데리고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정류장은 묘한 기분을 자아내게 했다.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며 바라본 정류장의 풍경 속에는 눈을 한 아름 실은 직사각형의 크고 긴 버스가 한 곳에 우르르 몰려있었다. 어쩐지 괴기한 풍경 같았다. 버스는 좀체 후진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데 이곳에서는 버스가 천천히 후진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러 대의 버스가 코너로 들어가기 위해 코너링을 하며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게임 속에서 유영하는 큰 외계 벌레 같았다.


 우리는 917번의 완행버스의 맨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녀는 내가 한 살 더 적다는 이유로 나를 창가에 앉혔다. 나는 그녀 옆에 남자가 앉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우물쭈물거렸는데 그녀가 나를 안쪽 의자로 밀어 넣었다. 버스의 의자는 불편했고 시트의 컬러는 적갈색으로 언제 청소했는지 모를 정도로 꼬질꼬질했다. 그녀는 ‘옷은 빨면 돼’하는 표정으로 편하게 앉았다. 버스가 풍기는 특유의 울렁거림이 있는 냄새가 뒷자리로 올라왔다. 앉아있는 자리의 창문을 조금 여니 밖의 시원한 공기가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때 묻은 커튼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녀에게 이끌려 밥을 먹으러 버스에 올라탄 것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꽤 멀리까지 가는 모양이었다. 그녀와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지금 그녀를 따라가는 것이 잘하고 있는 일일까.


 세상에서 잘하지 못하고 있는 일은 잘하는 일보다 훨씬 쉽게 집어낼 수 있다. 그녀는 버스의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으로 읽어낼 수 없었다. 즐겁지만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더 행복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덜 불행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버스가 연기를 뿜어내면서 터미널에서 출발했다. 버스 안에는 나와 그녀를 제외하고 다섯 명이 전부였다. 물론 운전사까지 포함해서였다. 그녀 옆에 남자가 앉을까 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에서 벗어났다. 버스가 출발함과 동시에 라디오는 [경주로 이어지는 7번 국도에서 18중 추돌의 교통사고가...]라며 뉴스를 내보냈다. 전국에 내린 급작스러운 눈으로 교통이 마비되었으며 사고의 소식이 나왔다. 그 사이에서 국가는 한 발 뒤로 빠지는 모양새를 취했고 망연자실한 사람들은 국가를 향해 욕을 하기 시작했다는 뉴스도 나왔다. 그녀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출발 전부터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버스의 진동에 따라 몸만 흔들거릴 뿐이었다. 창밖으로 고층의 건물이 지나갔고 고가의 다리 위로 버스는 지나갔다. 눈 덮인 사각형의 거대한 건물들은 아가리를 벌리고 인간들을 쏟아 내거나 끊임없이 집어삼켰다. 평일에도 아주 많은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나왔고 들어갔다. 줄곧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현실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눈이 내린 직후라 하늘은 청명했고 공기도 깨끗했다.


 자연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백악기의 공룡과도 같은 어마어마한 건물들은 비슷한 모습으로 제각각의 모습인 인간들을 찍어내듯 뱉어냈다. 건물에 다리가 붙어있다면 다리를 들어서 지나가는 인간을 한 번 밟고는 내장이 터져 나와서 신음하는 인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한 번 더 밟는 모습을 상상했다. 결국에는 그 무엇도 없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그런 몹쓸 상상을 하는 것을 알았는지 옆구리를 쿡 쳤다.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서 국도를 탔다. 국도의 도로변에는 눈이 내려서 아름다운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도로는 관리가 덜 된 탓인지 노면이 얼어서 버스는 제 마음껏 달리지 못하고 억울한 신음만을 토했고 자전거의 빠른 속도만큼만 달렸다. 느리게 흐르는 풍경에 나는 오랫동안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멍하게 앉아있었다. 라디오는 프로그램이 한 파트를 쉴 때마다 뉴스와 정보를 흘려보냈다. 때 아니게 쏟아진 눈은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뉴스를 나오게 했다. 주로 사고 소식과 사건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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