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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27. 2022

바람이 불어오면 31

소설


31.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녀가 나의 옆에 바짝 다가와서 물었다. 방안에서는 몰랐지만 그녀에게는 오드 콜로뉴의 향이 은은하게 났다. 반듯한 이마로 흘러내리는 그녀의 선은 콧등으로 향하면서 아름다웠다. 햇살이 비치는 한낮에 이렇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내겐 행운이 아닐까.


 “정말 재미없어”라며 그녀가 웃음을 보였다. 우리는 재미없는 이야기로 서로의 시간을 메웠다. 비 단계적 사고, 충돌과 접점, 사회화의 원리, 쿠바 음악이 에이즈 환자에게 미치는 영향, 전혀 다른 화제와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산고 도로와 간간이 보이는 바다가 전부였다. 도시를 벗어난 것이다.


 그녀는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걸까.


 버스는 그렇게 달려 어느 마을의 조그마한 간이 터미널에 도착했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내렸다. 잘 아는 곳이냐는 물음에 그녀는 그저 웃었다. 그녀는 처음 와보는 곳에 오고 싶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선배에 대해서 선배에 관련된 무엇인가에 대해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필사적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은 그녀와 선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땅을 밟으니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여자에게 낯선 그 무엇은 두렵기도 하지만 가보고, 만져보고 싶어 하는 관념일까.


 나는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작은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터미널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버스는 세 대가 고작 댈 수 있었다. 버스가 정차하는 터미널의 공간 중에 한 곳에서는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서 고추와 깻잎 같은 것을, 몸을 떨면서 팔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 중에 할머니들이 팔고 있는 깻잎이나 파를 사서 가는 사람도 있었다. 동네는 아주 작았으며 바다가 근처에 있는 싱그럽고 차가운 짠 내가 풍겨왔다. 그녀는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걸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 내 손을 맡긴 채 그녀의 걸음과 같은 속도로 걸었다. 그녀는 걸음이 느렸다. 마을에는 노인들의 모습만 보였고 조용하고 고요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위안을 주며 생활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곳은 노인들의 행성인 것이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 마을을 거닐었다. ‘동네 빠마’라는 미용실에는 같은 헤어스타일의 할머니들이 앉아서 같은 헤어스타일의 미용사에게 머리를 내주었고, 같은 헤어스타일의 또 다른 할머니가 미용실의 문으로 나왔다.


 눈이 와서 도로의 차들은 거북이 운행을 했고 이제 막 문을 연 작은 통닭집에서는 기름을 데우고 있었다. 약국에도 노인들이 데면데면 앉아서 무표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낚시점에서도 사람들이 앉아서 추위를 피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의 행성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딘가 흡수되지 못했다. 그 마을에서 우리는 누가 봐도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이 표가 났다. 노인정 같은 곳을 지나쳤다. 그녀는 노인정 앞에서 노인정을 한참 쳐다보았다. 마당에는 벤치가 몇 개 있었고 모닥불이 지펴져 있었다. 모닥불 근처에서 뒷짐을 진 군복을 입은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빳빳한 자세로 누가 보아도 군인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 같은 표정과 각이 잘 다려진 군복은 그의 마지막 자긍심 인지도 모른다. 모자를 쓰고 있었고 모자 밑으로 단정하게 깎인 하얀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더 하얗게 보였다. 대부분의 노인들의 추운 날 노인정 실내에서 따뜻하게 앉아 담소를 나누는데 마당에 서 있는 군복의 노인은 노익장이 대단했다.


 노인에게는 노인정 안에 있는 할머니들을 어떤 무엇인가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어떠한 명분 같은 것이 엿보였다. 그 명분이 보답이라고 하듯 그녀는 나를 잠시 놔두고 노인정 마당 안의 군복의 노인에게 뛰어가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노인은 뒷짐을 풀지 않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출현이 내심 반가워서 얼굴의 표정이 조금 상냥한 얼굴로 바뀌었다. 노인은 한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며 무엇인가 이야기를 그녀에게 했다. 그녀가 말을 할수록 노인의 굳은 표정은 슬며시 웃음으로 번지기도 했다. 노인은 때론 손짓으로 가리킨 곳으로 턱을 들기도 했으며 그녀와 헤어질 때 나를 조심하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그런 말이 내 귀에 들렸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노인과 헤어지고 노인정의 마당을 나와서 나를 이끌었다.


 전시장 안은 따뜻했고 오래된 시간의 냄새와 사라져 버린 노인들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냄새가 나쁘다거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냄새는 따뜻했고 깊은 그리움 같았다. 사진 속에 담긴 피사체는 전부 마을 노인들의 모습이었다. 주름진 손으로 기도를 하거나, 시커먼 기름 낀 손으로 그물을 손질하거나 뒷짐을 지고 강아지와 함께 거니는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그 사진들을 꼼꼼하게 꼿꼿한 자세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머리가 짧았으면 그림자를 상실한 그녀와 정말 똑같았다. 아니다, 그림자가 없는 여자가 그녀와 닮은 것이다. 그녀의 눈은 사진을 보고 있지만 사진을 보고 있지 않았다. 사진 속의 사람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고민을 해결하고 있는 모습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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