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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28. 2022

바람이 불어오면 32

소설


32.


 그녀는 고민의 단어들을 사진을 빗대어 하나하나 열거한 다음에 다시 머릿속에서 정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동자의 떨림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눈은 참 맑았다. 눈동자 속엔 잡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마치 자취방에 그녀의 모습을 놔두고 소녀의 모습인 그녀로 되돌아가 눈밭을 밟고 사진을 구경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사진 속의 노인들은 시간이 멈춘 채 그대로 서있거나 앉아있거나 했다. 마을회관에서 사진 전시를 해서 그런지 노랫가락이나 음악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적이 지배했고 그녀와 나의 발자국 소리가 드문드문 들릴 뿐이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그녀의 오드콜로뉴의 향이 뒤에 남았다. 나는 그녀가 남기고 간 냄새를 손으로 부여잡으며 따라갔다. 미동하지 않는 따뜻한 담요처럼 등에 살짝 걸린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언젠가 그녀의 옆에서 걸을 수 있을까. 지금은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시간은 따뜻했다. 이 정도만으로 나는 만족했다.


 “어떤 사진이 좋아?” 그녀가 정적을 깨며 말했다. 나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까만색이었다.


 “난 저 뒷짐 진 할머니의 사진이 좋아.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그냥 뒷모습의 할머니 사진이 좋아. 걸음걸이에 힘겨움이 잔뜩 묻어있는 사진 같아 보여. 노인이라서 힘든 걸까. 여자여서 힘든 걸까?” 그녀는 그 사진 앞으로 가서 시선을 두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스파게티도 먹어본 적이 없고, 아메리카노에 티라미수 케이크 한 조각도 먹어보지 못하고 늙어서 할머니가 된 것을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서글퍼.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떠나는 것일까? 멀어지는 것일까?”라고 그녀가 자분자분 말했다. 슈퍼 할아버지에게 나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들었다. 여전히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떠난다거나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싫은데요. 나무 같잖아요. 와서 사랑만 잔뜩 주고 떠나버리는 새를 기다리기만 하는…….”


 내 말에 그녀는 미소를 다시 한번 만들고는 손바닥으로 내 볼을 한번 쓰다듬었다. 손바닥이 차가워져 있었다. 내내 잡고 있을 때에는 따뜻한 것 같았는데.


 “넌 어떤 사진이 좋아?”


 “전 사진을 잘 몰라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사진은 사진 같아요. 그때 그 시간을 붙잡아 두려는 게 사진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사진은 그냥 사진이에요. 의미나 기법이나 반응은 잘 알 수가 없어요. 사진 속의 피사체는 소멸되더라도 사진은 버리지 않는 이상 영원하니까. 덕분에 우리는 앉아서 오래전에 찍어 놓은 건축 사진을 보면서 역사 속의 건축물을 알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영원한 것은 또 의미가 없어요. 영원한 건 가짜 꽃, 조화잖아요. 그래서 영원한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 같아요.”



 잠시 틈을 두었다.


 “또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은 빨리 소멸하니 그 생각을 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아요. 아름다운 것은 나에게서 전부 빨리 떠나가요.”


 나는 말했다.


 “넌 책을 좀 적당히 읽는 게 좋겠어”라며 그 미소로, 그 손바닥으로 다시 한번 내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차가웠다. 그녀가 손을 내리려 할 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차가워진 손바닥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다.


 “저기……”


 “응?”


 ““실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말할지 몰라서 말이에요.”


 그녀는 내 말에 호기심 많은 고양이처럼 고개를 살짝 젖히며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손으로 머리카락도 살짝 넘겼다.


 “당신은 얼마 전부터 하나씩 무엇인가를 버리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이름을 내다 버리고, 당신의 민증 번호를 내다 버리고, 주소를 버리고, 전화를 버리고, 그리고 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와서 이름도 모르는 마을에서 당신은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버리려 하고 있어요. 가장 버리기 힘든 것, 살면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것을 버리려 하고 있어요. 몸속에서 그것을 버리고 나면 껍데기만 남겠죠. 물론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자꾸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안 좋은 예감은 꼭 들어맞잖아요. 당신은 마치 당신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듯 보여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드는 거예요.”


 나는 바지에 오줌을 싼 아이처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내 말에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 볼을 어루만져 주지도 않았다. 미소도 짓지 않았다. 나는 불안했다. 불안이라는 벌레가 심장을 헤집고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꾸물꾸물, 꿀렁꿀렁 다니며 나를 구토로 인도한다. 나는 입술을 조금 물어뜯었다. 아랫니와 윗니를 이용해서 자꾸 입술을 물어뜯었다. 피가 났다. 피 맛이 구토를 잠재웠다.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따뜻한 빛의 통로를 따라서 수많은 먼지들이 이리저리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발길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사진 작품이 걸려있는 곳에서 저 사진 작품이 있는 곳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이 먼 곳,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와서 하나씩 버리고 가는 모양새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표정의 변화도 없이 조금씩 이동했다. 내가 옆으로 따라가서 같이 섰을 때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내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중에 버리라는 말에 나는 더욱 불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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