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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pr 09. 2022

3. 편지를 쓰다

소설


   

 우리는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다.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아지트를 정해놓고 지치지 않고 우리는 들락거렸다. 그곳은 지하에 위치했고 계단으로 내려가면 늘 습기에 찬 퀴퀴한 냄새가 났는데 습기를 없애기 위해 초를 켜놔서 꽤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분위기에 끌려 그곳을 아지트로 삼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인은 독일에서 미술을 공부하다가 와서 우리가 있는 이 동네에 ‘슈바빙’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열었다. 문예부 부장이던 기철이와 나 그리고 상후와 효상은 슈바빙에서 늘 학교 문예지 편집과 속지에 들어갈 사진 작업을 논하곤 했다. 슈바빙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풍부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일요일이면 눈을 뜨자마자 슈바빙으로 달려갔다. 슈바빙은 오전 9시면 문을 여는데, 나는 8시 30분쯤에 도착해서 굳게 내려진 셔터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슈바빙의 주인 누나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셔터를 올려주었다. “흐응, 왔구나”라고 하며 문을 올리는데 가끔 입에서 술 냄새가 많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슈바빙 주인 누나는 우리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여자였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게스 청바지를 늘 입고 있었고 가끔 게스가 아닌 청바지를 입고 있을 때면 그건 무슨 청바지냐고 물었다. 그러면 옆에서 상후가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라는 묘한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 것이 브랜드라니. 주인 누나는 몸매가 드러나는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고 있었다. 스무 살이나 많았지만 꼭 두 살 정도 많은 누나처럼 보이는 묘한 여자였다. 슈바방만큼 주인 누나도 분위기가 특이했다. 쇼트커트에 안경을 썼고 입술은 늘 진홍색에 가까운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고 손톱 바디도 길었으며 매니큐어는 언제나 검은색이었다.     


 내가 일찍 슈바빙으로 간 이유는 편지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나의 사정을 알고 있던 슈바빙 누나는 나를 위해 30분 일찍 문을 열어 주었다. 늦은 가을을 지나고 있는 일요일 오전은 고요했고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그것대로 운치가 있었다. 주인 누나는 린다 론스테드의 ‘롱롱 타임’을 틀었다. 오전이지만 밖은 온통 잿빛 하늘이 도사리고 있었고 여차하면 곧 눈이라도 나풀거리며 내릴 것만 같은 날이었다. 그런 날에 듣는 린다 론스테드의 ‘롱롱 타임’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우리가 늘 앉아서 이야기를 하던 테이블 말고, 바에 앉아서 편지를 썼다. 미국에 있는 여자애와 편지를 주고받은 지 2년이 훌쩍 지났을 때였다. 여자애에게 온 편지가 책장의 책만큼 가득했다. 주인 누나가 내 앞에 뜨거운 우유에 커피 조금과 위스키를 조금 넣어 주었다. 마시자마자 몸이 따뜻해지며 어떤 부분이 녹아내렸다.     


 "너 편지 쓸 때 아주 행복한 얼굴이 되더라.”     


 주인 누나의 말에 나는 볼이 약간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미국에 살고, 나는 내가 찍은 사진을 보내고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고 내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 조금씩 적은 소설을 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시에 대해서 많은 편지를 써주었다. 가령 자연주의 시인 워즈워스라든가 레이먼드 카버나 보들레르에 관한 시들, 그리고 로알드 달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편지에 써서 보내주었다.     


 “매일 그렇게 쓸 이야기가 많니” 주인 누나가 물었는데 나는 그저 씩 한 번 웃고 말았다. 린다 론스테드의 ‘롱롱 타임’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쩐지 린다 론스테드의 음악은 슈바빙 안에서는 마치 살아있는 메타포 같았다.     


 미국에 있는 그녀는 내가 보내주는 초현실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녀에게, 위싱턴 주의 학교에서는 존 가드너의 ‘그런델’을 모두 읽고 토론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존 가드너의 ‘그런델’은 내가 좋아하는 책이다. 후에 알았지만 존 가드너의 아내가 수잔 손탁이었다.     


 편지는 현실과 거리감이 있어서 봄에 받은 편지는 지난겨울의 이야기가 가득했고, 여름의 편지는 가을을 생각하며 보내야 했다. 아, 지난번에 그런 이야기를 적었지. 하며 미소 짓게 만들었다.     


 편지 속의 활자는 기기묘묘하여 꼭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비슷한 말이라도 해버리고 나면 그냥 없어져버릴 텐데 편지 속의 글자는 그것대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녀와 나를 이어주었다. 나는 매일 적은 편지를 일주일 씩 묶어 우체국에서 보냈다. 편지라는 건 처음 시작이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시작을 하고 나면 편지는 계속 써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편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그녀는 비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것에 어떤 게슈탈트가 적용이 되는 건 아니다. 비가 내리면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 준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죽게 된다. 그녀는 확실히 비를 닮았다. 편지를 주고받은 지 3년이 넘은 어느 날, 그녀와 나는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한국으로 온 것이다. 그때 내 손에는 그녀에게 들려주기 위해 린다 론스테드의 ‘롱롱 타임’이 들려있었다.



https://youtu.be/A0qm8nq8RcA

santad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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