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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Sep 04. 2022

라디오를 켜봐요 26

소설


26.


 어느 순간부터 해가 비치지 않았다. 머리 위를 보니 나무와 풀이 하늘을 덮었다. 그 광경 역시 대단했다. 한국에 이런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니. 비록 조금씩이지만 끊임없이 길은 오르막이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바벨탑 꼭대기까지 도달할 것 같았다.


 저 멀리 간간이 보이던 마을의 모습은 이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다른 세계로 빠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다리와 발은 그만하자고 아우성을 질러댔다. 살면서 이렇게 오래 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하루 만에 처음 해보는 일이 많아졌다.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참기 힘들었다.


  8월 속의 치론이는 힘이 들어 눈처럼 곧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팔짱을 풀었더니 치론이는 내가 멘 가방의 끈을 붙잡고 걸었다.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던 치론이를 보며 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때 볼이 발갛던 치론이는 정말 여자 같았다. 이미 옅은 화장은 다 지워졌고 그려놓은 눈썹도 땀 때문에 조금 사라졌지만 똘망똘망한 눈과 우리들에 비해 가늘고 뾰족한 콧대는 순간이지만 착각하게 만들었다.


 “또 뱀이다!”


 순간 치론이는 나에게 확 붙었다. 나 역시 뱀이 무서웠다. 뱀은 우리를 여봐란듯 무시한 채 원하는 대상이 있는 그곳으로 유유히 갔다. 교상이는 걸어가면서 계속 기도를 하며 하느님을 찾았다. 석가탄신일에 절에서 비빔밥이 그렇게 맛있다고 고타마 싯다르타를 찾던 놈이었다. 상혁이 친구가 사는 집으로 가는 길에는 대부분 고랭지 농사만 지었다. 논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끊임없이 나타나는 밭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여게는 말이데이, 지대가 높아가 논농사는 못 짓는데이. 오로지 밭농사만, 그것도 고랭지 품목만 재배할 수 있다 아이가. 어떻노? 우리나라 고랭지 품목...”어쩌고 하는 소리가 뉴스 앵커의 소리처럼 들렸다. 상혁이 친구의 친구의 까진 무릎에는 더 많은 날벌레들이 상처에 엉겨 붙어 있었다. 정작 본인만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영화 속의 모습 같았다. 결국 우리는 7시간을 걸어서 상혁이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마을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어두워지니 오토바이의 불빛도 제대로 비치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올려다본 머리 위에는 잠자리 수 백 마리가 날개 소리를 웅장하게 내며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상상 이상의 모습이라 경이롭고 무서웠다. 한 마리, 두 마리였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수백 마리의 잠자리 떼는 두려움을 울컥 가지게 만들었다.


 워낙 높은 지대라 그런지 덥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서늘하기까지 했다. 선풍기도 필요 없어, 라는 상혁이 친구의 말이 맞았다. 상혁이 친구의 집은 50년대에 지어진 집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티브이는 없었고 집에는 문을 밀고 당기는 여닫이문밖에 보이지 않았다. 집에 붙어 있는 모든 문이 여닫이문이었다. 집 주위는 온통 검은 산이었고 벌레 우는 소리가 자동차 엔진 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처음 집으로 와서 치론이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나왔다.


  화장실은 마당의 대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옆에 위치해 있었는데 헛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치면 이미 냄새가 확고하게 똥 간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밤이지만 파리 떼가 가득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냄새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숨을 멈추게 된다.


 이런 냄새가 나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냄새는 코를 막아도 숨을 쉬는 입으로 들어와서 뇌에 각인되었다. 그동안의 경험은 이런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 고통스러웠다. 브뢰헬의 ‘죽음의 승리’에서 갈기 찢겨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람이 느끼는 고통에 비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발을 디디는 발판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어이없이 밑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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