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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Sep 06. 2022

라디오를 켜봐요 28

소설


28.


 “너 이 자식, 언제 이렇게 음식을 준비한 거야?”


  상혁이가 질긴 멧돼지 고기를 이리저리 씹으며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무슨 소리냐며, 모친이 음식 준비를 했다고 했다. 우리는 아직 상혁이 친구의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기에 친구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하는데 상혁이의 친구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상혁이는 친구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려야 한다며 어머니가 있는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고 우리는 뒤에 일렬로 섰다. 친구의 어머니는 주무시다가 일어나셨는지 부스스했고 인사를 받고 그대로 다시 누웠다. 친구의 어머니는 거의 할머니 같은 모습이었고 우리를 반기는 기색은 없었다. 몸이 피곤해서 귀찮아하는 것 같았고 얼굴의 표정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찰흙으로 빚어놓은 영화 속의 인물 같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술에 취해갔다. 소주는 기가 막힐 정도로 차가워서 멧돼지 고기와 마늘장아찌를 곁들여 같이 마시니 꼭 세리주 같았다. 우리는 뜨거운 감자밥과 고기를 상추쌈에 싸서 소주를 계속 마셨다. 소주는 몸을 문어다리처럼 만들었다. 조그만 밥상을 중간에 두고 우리는 여자애들처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했다.


 치론이는 늘 내 옆에 앉아서 소주를 마셨고 아이들의 이야기에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잘 웃어주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상혁이 친구가 치론이의 말투를 듣고 어쩐지 여자 같다는 말을 했고 늘 듣는 말이라고 치론이는 말했다. 치론이는 그날 술을 많이 마셨다. 살이 찐다며 늘 조금밖에 먹지 않았고 그날 역시 배가 고팠음에도 고기를 일절 먹지 않고 감자 조금과 술만 들이켰다.


 허리가 27인치였는데 저리다가 허리가 소멸될 것 같았다. 내 옆에 붙어서 소주를 마시던 치론이는 소주가 들어갈수록 온기가 달아올라 따뜻한 돌 같았다. 무릎을 양팔로 감싸고 한쪽 팔이 나의 팔에 닿아 있었는데 조금 지나자 팔에 땀이 배었다.


 치론이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잘 웃었지만 웃지 않을 때는 눈을 방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 모습에서 차가운 어둠이 보였다. 역시 순간적이었다. 방안에는 허용되는 언어와 그렇지 못한 언어가 마구 뒤섞였고 한동안 방 안의 공기를 휘저었다.


  친구들의 웃음소리, 소주잔이 부딪히는 소리.


  방 안을 비추던 밝지 않았던 형광등의 빛이 섬광처럼 부풀어 오를 때 우리는 누구 먼저랄 것 없이 방바닥에 곯아떨어졌다. 몸은 깊은 물속에 있는 것처럼 좀체 움직이지 못했고 기기묘묘한 무게가 몸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술이 뇌의 끝을 잠식하는 순간 쓰러져 잠이 들어서 이불을 펴고 잠들었는지 어쨌는지 기억도 없었다. 촌에서 나고 자란 상혁이의 친구도 밥상을 겨우 물리고 방구석에 그대로 엎어져 잠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 몸을 포개며 잠이 들어 버렸다.


 달빛도 들어오지 않는 방은 아이들이 내뱉는 숨 냄새와 숨소리에 누군가 들어온다면 미간을 좁히며 나갈지도 몰랐다. 잠이 들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꿈도 꾸지 않았고 그저 깊은 잠이라고 하는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니 세계가 끝이 나려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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