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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Sep 28. 2022

그리즐리 씨, 고마워요 19

소설

   



19.


  “기차는 멈췄고 우리는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기차가 멈추지 않는 것이 문제지 이미 멈춘 기차에서는 느긋함을 가지세요. 봐요, 아직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께서 청소를 하고 계시잖아요.” 그녀가 그를 지그시 보며 말했다. 여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다리의 통증이 화끈하게 올라왔다. 바지를 걷어 올려 정강이 부분을 보았다. 그곳에는 상처가 있었고 정의할 수 없는 허연 연고가 발려진 흔적도 보였다. 그리고 상처는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리즐리와의 일이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기뻤다. 그 일은 그에게로 하여금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에도 견뎌낼 수 있는 용기 같은 것을 불어넣었다. 퉁퉁한 여자는 그의 곁에서 그가 천천히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퉁퉁한 여자가 부축해서 기차 밖으로 무리 없이 나올 수 있었다. 밖의 차가운 겨울 기운이 콧속으로 들어왔다. 낯설지 않았다. 이제 곧 봄이 온다.     


  그리즐리는 알래스카로 잘 갔을까?     


  “당신은 어디로 가죠?”라며 퉁퉁한 여자가 말을 했다. 그녀에게 기대어 걸으니 아주 안정적이었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안온감. 포근한 기분. 이 여자에게 죽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목적지가 없어졌어요. 저 오늘은 급하게 가야 할 곳이 없어요. 아무 곳에나 가면 됩니다.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어머, 그래요? 저도 그런데 말이에요. 그럼 모닝커피 어때요?”


  “저, 그것보다…….”


  “네?”


  “초면에 실례가 안 된다면, 저 갈비탕이 먹고 싶은데…….”


  호호호 하는 큰 소리의 퉁퉁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기차역에 기분 좋게 퍼졌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시원시원한 그녀였다. 중요한 건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그녀의 기분 좋은 향을 맡으며 기차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서 역의 직원이 뛰어오면서 그녀를 불렀다.


  “함고동 씨, 함고동 씨!”하며 뛰어왔다. 지갑을 두고 내려서 지갑 안의 신분증을 보고 알아봤다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지갑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맙소사.


  그녀는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내 이름이 좀 그래요. 하는 눈빛을 보이고 그를 부축해서 기차역을 빠져나갔다.


  “저 그런데 어떤 소설을 쓰시죠?”


  “소설은 읽어야죠. 들으려 하면 안 돼요.”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알려드릴게요. 번개 맞는 인간을 쓰고 있어요. 번개를 5번이나 맞고도 죽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예요. 단편인데 이제 장편으로 만들어 볼 요량이에요.”


  “저에게도 읽을 수 있는 영광이 돌아올까요.”


  그들의 이야기는 기차역에서 점점 멀어져 조그맣게 들렸다.


  “그런데 아까 83년도에 나라에 큰일이 닥쳤다는 것은 무슨 일이에요?”


  그들의 말소리는 점점 작아져 점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제가 태어난 해인데요……. 그때 나라에는…….”


  기차역을 빠져나가는 순간 그들의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겨울의 날은 차디찼고 맑았으며 신선한, 또 다른 공기와의 만남을 그와 그녀는 가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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