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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Sep 27. 2022

그리즐리 씨, 고마워요 18

소설


18.


  “저는 이제 죽는 건가요? 그리즐리 베어 씨?”


  “하하, 죽다뇨. 점액질이 묻은 상처가 나으려고 그러는 것이니, 자 이 알약 하나를 드세요. 그럼 잠이 푹 들 겁니다. 잠에서 깨고 나면 모든 것이 제 위치로 돌아가 있을 겁니다.”


  그리즐리는 누워 있는 그의 입에 알약 하나를 밀어 넣었다. 그는 이 알약을 먹고 나면 영영 잠에서 깨지 못할 것만 같았다.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약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저 멀리서, “당. 신. 은. 영. 웅. 입. 니. 다.”하는 소리가 아주 작게, 작게 들렸다.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는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웬 퉁퉁한 여자가 그를 흔들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니 기차 안의 의자였다. 기차는 목적지까지 왔다.


  “이 보세요, 당신은 악몽을 꿨나요?”퉁퉁한 여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엣?”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봐요 당신. 제대로 땀을 흘리더군요. 덕분에 전 당신의 땀을 닦아 주느라 쉬지도 못하면서 이곳까지 왔어요.”퉁퉁한 여자가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그런데 당신, 이상한 이름을 외치면서 꿈을 꾸더군요. 그리즐리는 뭐죠?”여자가 흥미롭게 물었다.  

   

  그리즐리? 그래, 난 그리즐리와 함께? 꿈이었나? 그럴 리가 없다.      


  그는 기차의 창밖을 보았다. 아침이었다. 기차는 야간 완행으로 가는 무궁화호였고 겨울의 차가운 아침의 풍경이 보였다. 창을 통해 아침햇살이 따갑게 그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는 인상을 쓰며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퉁퉁한 여자는 버버리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아직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저기 지금은 몇 년도인가요?”그가 여자에게 물었다. 퉁퉁한 여자는 진홍색의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로 “2013년 2월이에요. 그래, 꿈속에서는 몇 년도에 갔다 오신 거예요?”라며 퉁퉁한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구백팔십삼 년에? 간이역에서 가락국수를 한 그릇 먹고 올라타서……. 그리즐리는 만났는데…….”


  “83년도요?”라며 퉁퉁한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그는 얼굴에 땀이 흘렀다는 느낌이 있었다. 몸이 무거웠지만 조금씩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 그 해는 제가 태어난 해에요. 그해 나라에 큰 어려움이 있었데요.”


  그가 퉁퉁한 여자의 말에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는데 기차에서 방송을 했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했으니 잃어버리신 물건이 없나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잘 가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가 방송을 들으며 정신을 차려보니 퉁퉁한 여자에게 기대어 있었다.


  “덕분에 제 버버리 외투가 땀에 젖었네요”라고 했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너무 몸을 구기고 잠들어서 그런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여자에게 잠시 실례한다고 말한 후 전화를 받았다. 퉁퉁한 여자의 미소는 정말 낯익었다. 전화를 받으니 사무실에서 온 전화였다. 거래처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에게는 거래처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거래처에서 앞으로 5년 동안은 죽 거래를 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는 왜 갑자기?라고 말하려다가, 알았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즐리가 해결했구나.     


  그의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어머, 당신 웃는군요. 이제 좀 나아지려는 모양이지요. 악몽을 꾸고서는.”퉁퉁한 여자는 그의 웃음에 기뻐했다. 기뻐하는 모습도 진심이었다. 그는 이 퉁퉁한 여자에게 조심스레 호감이 갔다. 기차에서 사람들이 전부 내리고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올라왔다. 퉁퉁한 여자는 아직 가지 않고 그의 곁에 있어 주었다.


  “아가씨는 왜?”라고 그가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여자의 눈동자는 퉁퉁한 얼굴에 비해 작았지만 눈이 아주 맑고 투명했다. 낯설지 않았다.


  “악몽을 꾼 다음에는 잘 일어나지 못하죠. 당신을 기차 밖으로까지 무사히 데리고 갈게요, 그런 다음 전 가도 괜찮아요.”시원시원하고 막힘이 없는 말투였다.


  “악몽을 꾼 다음에는 잘 못 일어나요? 어쩐지 소설 같군요.”


  “어머, 저 소설을 적고 있어요.”


  “그래요? 전 소설이라면 읽은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의 말에 퉁퉁한 그녀는 입을 가리고 크게 웃었다. 길쭉하고 퉁퉁한 손가락 사이로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기분 좋은 치아의 모양새였다. 그녀의 피부는 정말 하얗고 뽀얗다. 손으로 피부를 만져보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 그는 기대고 있던 여자에게서 몸을 뺀 다음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다리의 힘이 풀렸다. 그녀의 말이 정말이었다. 그리고 다리의 통증이 느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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