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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Sep 20. 2022

그리즐리 씨, 고마워요 11

소설


11.


 해프닝을 바라는 군상들이 모여 낮과 같이 만들어버린 밤의 세계가 가득해서 그는 밤이 되면 얼른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재의 밤에 비해 그가 바라보는 창밖은 그야말로 인도 여자처럼 흑발로 가득했다. 기차는 그런 컴컴함을 뚫고 터득 터득 앞으로 나아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도무지 마을이라든가, 가로등의 불빛이라든가. 강이라든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세차게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차창에 박혀 있던 시선을 그리즐리에게 돌렸다. 그리즐리는 조금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그래, 괜찮아, 용기를 내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즐리 씨,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기대는 마세요. 전 아마 죽을지도 몰라요.”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작아져갔다. 그리즐리는 그 큰 앞발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프지 않았고 큰 앞발이 움직이는데도 자연스러웠다. 열차는 간이역에도 쉬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잠이 들었던 사람들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안 보이네요?”그가 말했다.


  “지금 기차는 우리가 타고 있는 이 기차 칸 하나뿐입니다. 아까 함고동 씨가 창밖을 쳐다보고 있을 때 승객들은 다른 칸으로 이동을 했고 그 다른 칸은 원래의 철로로 목적지까지 잘 갔을 겁니다. 차장에게도 이 한 칸은 빌려야 한다고 말을 해두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우리가 가는 청량사의 축융봉까지 어떻게 가겠습니까. 봉화에 내리거나 안동에 내려서 그 새벽에 버스를 타겠습니까, 택시를 타겠습니까(그리즐리는 자신의 몸집을 가리키며).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당신을 무서운 곰을 부리는 사람으로 본다거나, 저처럼 거대한 곰을 보고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기차를 타고 축융봉의 밑까지 가는 것이죠. 그 밑까지 철로가 나 있습니다. 아주 다행입니다.”     


  뭐야, 이미 차장에게 말했다고? 언제 말했단 말인가. 자신도 모르는 새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다. 차장에게 기차를 빌릴 정도면 나에게 굳이 차표 값을 빌리지 않아도 되었잖아. 하지만 사정이 있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와서 표 값이니 83년도니 해봐야 눈앞에 곰이 말을 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일어난 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괄태충의 형태를 만들어내느라 사고(思考)하는데 에너지를 쏟았다. 기차는 쉬지 않았다. 소변도 마렵지 않았다.


 한 칸이라서 그런지 반동도 심했고 터득 터득 거리는 소리가 묵직함에서 벗어난 듯했다. 물론 소리로 써가 아닌 느낌으로 말이다. 터득 거리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밝아오지 않는 밤은 없는 것처럼 서서히 여명이 그 붉은빛을 저 멀리서 드러내려고 했다. 조금씩 날이 밝아오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산이었다. 아주 깊은 산속 같은데 기차선로가 놓여 있었다.


 실지로 선로가 놓여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즐리는 목적지에 가까워 오자 말수가 줄어들었다. 목소리 톤도 한껏 가라앉았고 긴장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리즐리는 그에게 자신의 그러한 긴장을 전달하지 않으려는 듯 미소를 여전히 머금고 있었다. 그와 그리즐리는 긴장된 순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아직 또렷이 떠오르지 않는 괄태충과의 격투를 생각했다. 괄태충이라. 일단은 달팽이 과에 속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을 것이다. 달팽이는 자웅동체라고 그는 알고 있었다. 습한 곳에 서식하며 연갈색의 미끄덩거리는 점액질로 뒤덮여 있는 그것의 크기가 아주 크다고 단정 지었다.


 그 외에는 거대한 괄태충에 대해서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전투기가 지나가듯 잠시 형상이 생성되었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기차는 산속으로 비스듬한 길을 잘도 올라갔다. 그렇지만 평지를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생각한 것에서 여지없이 벗어나 있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면 바로 나뭇가지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기차의 창문은 오래 전의 것으로 창문을 올리면 십 센티미터 정도만 올라갔다. 더 이상은 위험해서 올라가지 않았다. 고양이가 빠져나갈 정도로 올라간 창문 틈으로 산속의 차갑고 상쾌한 겨울의 내음이 기차 안으로 확 들어왔다. 그리즐리도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나무의 냄새는 아주 좋았다. 죽어 있지 않은 생동감이 무럭무럭 느껴지는 냄새였다. 이렇게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산속의 나무들은 견디고 있었다. 만약 돌을 괄태충에게서 찾아오지 못한다면 그런 나무들도 전부 죽어버릴 정도의 추위가 닥친다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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