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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범이는 자연스럽게 가만히 앉아서 할 수 있는 놀이에 심취했고 그림 그리는 것에 몰두했다. 준범이가 그리는 그림 중에는 구름이 땅에 내려앉아 있거나, 달리의 그림처럼 시계가 녹아내리는 그림이라든지, 사람의 얼굴도 눈이 한 개라든가 개의 몸에 인간의 얼굴이 붙어 있는 그림들이었다. 이런 그림들을 그리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재미있어 보였다. 사물을 보고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보다 훨씬, 아주 훨씬 재미있어 보였다. 그리고 준범이가 그린 그림은 계속 보게 하는 그런 묘한 기운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그런 준범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준범이와 가까워진 건 미술시간이 계기가 되었다. 조를 짜서 마블링 데칼코마니를 도화지에 표현하는 시간이었는데 말이 없던 준범이는 그 조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우리 조에 한 사람이 비어서 나는 준범이를 우리 조에 넣어서 같이 했다. 마블링은 물에 색색의 물감을 떨어트려 도화지의 한 면을 적셔서 건져 올려 반으로 접으면 마블링이 데칼코마니가 되어 기묘한 문형이 탄생한다. 내가 시범을 보이면 준범이는 몹시 재미있어했다. 너도 해봐,라고 내가 준범이에게 물감을 주었고 준범이는 물감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가볍게 저으라고 내가 말했다. 준범이는 그렇게 해서 도화지에 물감을 묻혀 반으로 접었다가 폈다. 그랬던 그 속에는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형태가 있었다. 우리는 손뼉을 쳤다. 준범이는 처음으로 웃었다. 그 뒤로 우리는 친해졌다. 준범이는 말이 터이니까 부쩍 말을 많이 했다. 미술시간에 정물화를 그렸다. 사과를 그리는 시간이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사과를 그리느라 열심히 붓질을 했다. 하지만 준범이는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의 그림을 그렸다.
넌 정말 멋진 놈이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준범이의 그림에 반해버렸다. 웅크리도 앉아 있는 아이는 꼭 사과 같았다. 고독을 잔뜩 짊어진 아이처럼 보였다. 선생님이 와서 왜 사과를 그리지 않고 이런 그림을 그렸냐고 했다. 선생님 눈에는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사과처럼 보이자 않는 것일까. 준범이는 썩은 사과를 먹은 아이가 배탈이 나거 배를 움켜잡고 앉아 있는 거라 뱃속에 사과가 있다고 말했다. 진짜 준범이는 멋진 놈이었다. 덕분에 준범이는 선생님에게 30분이나 혼이 나야 했다.
준범이는 나에게 많은 말을 쏟아냈다. 말을 많이 쏟아냈지만 말들이 연결이 제대로 되는 말은 아니었다. 신나서 이야기를 했지만 이 이야기를 하다가 저 이야기를 느닷없이 했고, 갑자기 질문을 하더니 혼잣말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준범이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오랜만이야. 준범이의 엄마가 말했다. 아줌마는 한껏 들떴다. 준범이는 집 밖에서는 이렇게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준범이가 학교에서 말을 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아줌마도 신이 났는지 준범이와 나에게 말을 많이 했는데,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준범이가 하는 여러 말이 이상하지만 나쁜 의도 같은 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은 그런 준범이를 자꾸 밀어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준범이는 그저 즐거워서 말을 하는 것이다. 준범이의 가방에는 항상 스케치북이 들어 있고 거기에 못다 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렸다. 물론 초현실 그림 같은 그림들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