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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Feb 16.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5

1장 당일



5.

 치누크.


 치누크가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


 치누크가 왜 이 나라의 이 도시에, 이런 밤에 불어온단 말인가.


 학창 시절 공부를 그렇게 썩 잘한 기억은 없지만 그때 기억 속에 과학적 견해 따위로 보면 지금 불어오는 바람은 분명 치누크와 흡사했다. 마동이 서 있는 이곳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건조 단열률로 인한 기온의 변화를 느낄만한 푄이 나타날 지역이 아니었다. 습하고 찬바람이 산을 따라 올라가는 과정의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이 따뜻하고 이질적인 푄은 분명 이곳에서는 전혀 나타날 리 없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치누크에 가까웠다.


 마동은 사람들의 반응이 보고 싶었지만 이미 일렬횡대의 아주머니 무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 외의 사람들 모습이라고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금 불어오는 바람이 어떤 바람인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은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는 무엇이 일어난다 한들 그 무엇은 평범한 일상 속의 한 부분이 된 세상이다. 사람들은 조금씩 미쳐가고 있어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단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곳곳(교회, 체육, 교육)에서 성범죄가 만연했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괴리가 있으면 폭주해버리는 지금 시대의 이곳에서 치누크가 불어온다고 한들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마동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치누크는 지속적으로 마동의 등으로 와서 부딪혔고 기시감을 건드렸다. 여름의 지속 중에서 오늘처럼 장마 기간 속의 달리기보다 아주 무더운, 낮의 온도가 35도를 넘어가고 밤에도 숨이 턱턱 막히는 그러한 무더운 여름날에 달리는 것을 마동은 좋아했다. 그런 날은 땀도 비가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땀이 비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그런 경험을 표현하기가 쉽진 않지만 어찌 되었던 대단한 경험인 것이다. 준비운동을 가열하게 하고 달리기를 시작해도 십오 분 정도까지는 달리는 행위가 몸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준비운동은 가급적이면 신중하고 진지하게 해 줘야 한다. 다리의 근육을 풀어주고 굳어있는 근육을 전부 이완시켜야 한다.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풀어주는 과정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고통이 잠시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기분 좋은 고통이다.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 느끼는 약간의 고통은 이전의 극심한 고통을 맛보았기에 참아낼 수 있다고. 어디서 읽은 것일까. 책일까. 영화 속 대사일까.


 기억이란 꺼내려고 하면 자꾸 멀어져만 간다.


 다리의 굳은 근육을 풀어주는 과정에서 얻는 고통은 다른 차원의 고통이다. 이 기분은 알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역시 모르는 이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봐야 우랄알타이어를 듣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준비운동이 끝이 나면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십오 분 이상을 달리고 나면 속력을 높인다. 그대로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면 되는 것이다. 다른 건 없다. 그렇게 삼십 분을 넘어서면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숨이 가쁘다는 느낌은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준다. 공포영화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할 줄 모른다고 ‘쏘우’에서 말했다. 쏘우는 이후에 꽤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리며 후속 편이 지속적으로 나왔다. 쏘우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중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 후속작을 속속 탄생시켰다. 흥행이라는 것은 사고체계를 무너트렸다. 그 점이 마동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런 마음이 영화인들의 귀에 들어갈 리는 없다. 설령 들어간다고 한들 무시되기 일쑤다.


 다리의 움직임은 일정한 보폭으로 멈출 때까지 유지한다. 조깅을 하고 삼십 분을 넘어가면 탄력을 받아 속력을 내며 달릴 수 있다. 그대로 두 시간을 달리면 데드 포인트까지 치닫는다. 한계치에 도달해보는 것이다. 4킬로미터가량 뻗어있는 오르막길을 달리면 심장이 파열할 것 같고 다리도 돌처럼 딱딱해지는 게 느껴지고 그대로 주저앉고 싶다. 하지만 마동은 그것을 넘어서서 달렸다. 팔을 더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인다. 마동에게 달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데드 포인트를 넘어가면 죽음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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