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 - 서울, 1964년 겨울 오마주
12.
그냥 가시죠.
아닙니다, 받아야 할 돈이 있다니까요.
그렇게 말을 하니 ‘안 형’이 다시 ‘김 형’이 있던 골목 끝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대문이 열리고 주인아주머니가 나왔습니다.
누구시죠?
죄송합니다, 이렇게 너무 늦게 찾아와서 실은…….
술이 취하신 것 같은데, 누구시죠?
저는 조용하게 말했습니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한 번 더 말했습니다. 월부 책 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한 번 더 말했을 때 저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렇게 크게 소리를 질러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몸에 남아있는 기운이 전부 무엇에 의해 쪽쪽 다 빨려 나가 버린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만 문기둥에 두 손을 짚고 뻗은 팔 위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만 오열을 하고 말았습니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월부 책값…….
책값…….
여보.
저는 인간 공포가 심해졌습니다. 여보라고 흐느낄 때 알 수 있었습니다. 내일 낮에 오라며 대문이 닫혔을 때 저는 인간 공포가 극에 달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이란 어디를 가도 있습니다. 인간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매일 격한 공포를 느끼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무시를 당한다는 건 본디 인간 공포를 깔고 있는 것입니다. 대문 저 안쪽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무섭고, 귤을 팔던 리어카의 귤 장수도 무섭고, 술집에서 모르는 이들끼리 테이블에 모여 앉아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무서워졌습니다.
제게 남은 사람이라곤 오늘 처음 만난 ‘안 형’, ‘김 형’ 저 둘 뿐입니다. 저들은 오늘 밤 저와 함께 있어 줄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