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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r 10.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26

1장 당일



26.

 마동은 오컴의 면도날을 대입시켜 긴팔의 긴치마를 입은 여자가 비에 젖지 않는다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대입하려고 했지만 첫 관문에서 막혀 버렸다. 마동은 생각을 다시 시작점으로 돌렸다. 어쩌면 저 여자는 옷 속을 비에 젖지 않는 장치로 채웠을 것이다. 그 장치가 조금 추하기 때문에 긴팔에 긴치마를 입고 있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는 것을 일기예보를 통해서 전해 들은 회사는 그러니까 저 여자가 속해있는 회사(이 회사는 비에 젖지 않는 장치를 개발하는 회사로)는 직원인 저 여자에게 실험을 목적으로(대신 사 내에서 더위를 타지 않는 여자에게 월급 이외의 보너스 수당을 듬뿍 지급하기로 합의를 한 다음) 인적이 드물 것 같은, 오늘 같은 날의 강변 조깅코스를 천천히 걷게 하는 것이다. 회사는 우산 없이 비를 맞지 않는 장치를 개발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비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할 뿐, 비에 젖은 것은 바퀴벌레만큼 싫어했다. 우산을 드는 것도 사람들은 귀찮아했다. 회사는 프로젝트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개발은 계획처럼 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빠르게 걸으면 비에 젖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천천히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속도를 붙여가면서 실험을 이어 갈 것이다. 회사의 연구팀은 어딘가에서 여자를 주시하거나 사무실에서 무선망으로 그 결과를 그래프로 받아서 체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가설을 세우고 나니 어느 정도 이치에 맞아 들어갔다. 그런데, 저렇게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감에도 달리는 마동을 앞질러 앞서 걸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막히기 시작했다. 아무리 채워도 바닥이 드러나는 그릇처럼 막막했다.


 그래, 생각하기를 포기하자.


 마동은 더 이상의 생각은 해롭다고 느끼고 그대로 달리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늘 하던 대로 그저 달리는 것이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평소와 같을 것이다. 내일 당장 상담을 받아 보는 것에 마동은 자신과 합의를 본 후, 다리에 힘을 주었다. 타인의 일인데 뭐, 하며 여자를 지나쳐 앞으로 내쳐 달리기 시작했다. 긴팔의 긴치마의 여자가 옆에서 뒤로 멀어져 갔다. 달라다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의 모습은 곁눈질로 볼 때보다 확실히 미. 스. 터. 리. 했다.


 키는 163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돼 보였지만 키가 커 보였다. 긴치마에 가려져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높은 구두를 신어서 그럴 것이다. 굽 속에 비를 맞지 않는 장치를 숨겨 두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키가 커 보였다. 확실하게 그렇게 보였다. 마동의 키가 그렇게 큰 편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치면서 본 여자의 키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멀어지면서 보면 여자의 키는 상당히 커 보였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여자의 얼굴이 눈에 잘 들어왔다. 여자는 외국의 매력적인 모델인 안젤라 카사모안의 얼굴과 닮았다. 그렇게 보였다. 눈매가 동양인의 것이 아니었다. 안젤라 카사모안과 닮았다고는 했지만 분위기는 달랐고 화장이 진한 안젤라에 비해 옅은 화장이 여자의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여자의 눈매는 브리티시 여자들처럼 쑥 들어가 있었다. 입체감이 드는 눈매였다.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을 보는 듯 비현실적인 눈이었다. 그래서일까. 눈동자의 깊이가 몹시 깊었다. 깊은 눈동자는 떨어지는 비에도 전혀 깜빡임 없이 정면을 또렷이 응시하고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로지 걸어간다. 앞으로 가는 것 하나에 모든 신경을 쏟아부은 것처럼 보였다. 긴팔을 입었지만 타이트해서 팔이나 몸매가 드러나 보이는 것이 기이하고 신비스러워 보였다.


 여자가 입고 있는 긴팔에 긴치마의 옷은 블랙 계통의 옷이었다. 이 밤에 홀로 뜬 달을 시기하듯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있었고 비를 뿌리고 있어서 달빛이 너무 미미했지만 연약한 달빛을 받아서 상의의 자수가 살짝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은 여자의 얼굴과 함께 신비스러움을 가중시켰다. 그러고 보니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달빛이 미미하게 비치는,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밤이었다. 치누크가 불어와 기시감이 떠올랐다면 자수의 신비한 빛은 기시감을 좀 더 구체성을 띠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 구체성이라는 것이 불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여 무엇인지 감지해내지는 못했다. 마동은 이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내일 상담을 통해서 다 쏟아내야 할 것만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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