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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r 14.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30

2장 1일째


30.


 [1일째]

 언제나 희미했다. 우리는 철길 위에 누워서 희미하게 비치는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태양빛은 언어를 잃어버릴 만큼 따스했고 불안정한 마음을 쓰다듬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들꽃이 기찻길 주위에는 만연했고 코를 간질이는 바람이 불어와 누워있는 우리를 시원하게 만들었다. 옷이 두껍지 않았고 버드나무의 아름드리가 보이는 것이 아마도 봄인 듯했다. 저 멀리 울타리가 보였고 기찻길 옆으로는 무성한 숲도 보였다. 숲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 같았다. 나는 내 옆에 누워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작고 따뜻했다. 그녀가 내 손을 꼭 쥐었다.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에 나는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은 희미하기만 했다.


 내가 눈이 나빠진 걸까.


 그녀의 얼굴을 점점 충분히 볼 수 없어졌다. 희미한 얼굴 속에 나를 보며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눈을 한 번 비볐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가 웃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했지만 나는 그 입모양을 볼 수 없었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누운 채로 그녀 옆으로 좀 더 다가가려면 언제나 꿈에서 깼다.     


 마동은 종종 같은 꿈을 꿨다.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내용의 꿈이 지치지 않고 반복되었다. 그 속에서 헤매다가 깨어났다. 꿈의 시작과 끝은 없고 늘 중간만 있을 뿐이다. 전경은 확실했지만 옆에 누워있는 작은 여자 아이의 모습은 언제나 희미했다. 꿈속에서 마동은 어렸다. 요즘 입고 있는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그건 마치, 마치.


 눈을 떴을 때 마동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느꼈다. 오늘 이전의 날과 지금이 다른 점은 눈을 뜨니 18킬로그램짜리 작은 아이가 몸을 누르고 5킬로그램짜리 덤벨(dum-bell) 두 개가 몸속에 들어와 가중을 더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무거웠다. 일어나는 것이 힘겹다고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어젯밤 조깅을 하다 모기에 물렸는데 목 언저리가 따끔거리고 가려웠다. 따끔함이 지속되는지 신경이 쓰였다. 무의식적으로 물린 부분에 손을 대고 긁었다. 물린 주위가 부어있었다. 콧물은 나지 않았지만 코가 막히는 느낌도 들었다.


 설마 감기인가.


 한여름에 감기 기운이라니, 마동은 매일매일 조깅을 하는 탓에 감기를 앓아 본 적이 없다. 그동안은.


 군대에 있을 때 제대하기 전에 부대에서 감기가 한 번 걸린 적이 있었다. 그때 심하게 감기를 앓으면서 감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이후에 감기는 동네의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감기 바이러스는 마동과 동떨어진 단어였다. 세균이란 무더운 여름에 창궐하고 바이러스는 차가운 계절에 나타나는 것에 비한다면 여름날의 감기 기운은 마동에게 그야말로 이질감이 드는 무형질의 몹쓸 것이라 어처구나가 없었다. 바이러스도 변이를 거듭하여 무더운 날에도 에어컨의 바람을 통해 사람들의 틈 속으로 파고들었다.


 침대에서 서서히 일어나서 욕실을 향해 구울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역시 힘겨웠다. 욕실까지 걸어가는 것이 이렇게 힘겹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으려고 거울을 보니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오전에 충혈된 눈을 보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욕실의 거울을 통해서 바라본 얼굴은 평소에 자신의 얼굴과는 다른 얼굴처럼 보였다. 여름 감기 기운 때문인지 조소 가득한 핏빛 서린 눈동자와 멸시가 서려있는 표정이라서 또 한 번 놀랐다. 어쩐지 다른 사람이 거울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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