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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Sep 23. 2023

하루키 오마주 소설 18

소설


18.


 깜빡 잠이 들었었다. 나는 회사 책상에 엎드려 두 시간을 잠들었다. 그 누구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나는 발밑을 보았다. 신발 밑창이 온통 흙투성이 었다. 군인들을 만났을 때 그 흙이다. 군인들은 가짜가 아닌 것이다. 사무실은 업무 때문에 분주했지만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입을 한 일자로 다물고 업무에 몰두하는지 새삼 알 수 없었다.


 모두가 아마도 행복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건 아주 찰나적이다. 순간적이며 아, 하는 순간 저 뒤로 가버리고 마는 것이 행복이다. 만족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진다. 그러니 행복이라는 걸 만족하지 못한 채 우리는 어쩌면 행복만을 좇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삶을 사는 게 우리 인간이다. 강아지처럼 그저 주인만 있으면 행복할 수 없는 게 인간이다. 행복에는 반드시 욕심이 뒤따른다.


 나는 경위서를 팀장에게 제출하고 회사를 나왔다. 내가 복도를 걸을 때마다 신발 밑창에 묻은 흙이 말라서 조금씩 떨어졌다. 어떤 직원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회사를 조퇴해서 나와 본 적이 그동안에는 없었다. 이 시간에 회사 밖으로 나와서 자유를 누린다는 기분은 오래전 학생 때 수업을 땡땡이치고 나와서 거리를 활보하던 기분과 비슷했다. 불안한 해방감이었다. 막대한 자유가 주어졌지만 이 모든 책임을 내가 져야 한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잔뜩 안고 자유를 누리는 불안이 아주 껄끄럽다.


 아직 오후 4시인데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다니고 오락실에서 오락을 하고 아이쇼핑을 즐기며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카페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침착하게 하루가 흘러간다는 게 사뭇 새삼스러웠다. 이 시간에 업무만 보는 사람과 이렇게 시간을 즐기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누가 이렇게 사람들을 갈라놓았을까. 이런 게 세상이 돌아가는 제대로 된 사이클일까.


 그때 누군가가 이봐, 형씨. 하며 불렀다. 도대체 요즘 형씨라고 부르는 사람이 누구야. 형씨라니? 외국 영화를 보면 번역에 죄다 형씨다. 경찰에게도 형씨, 변호사에게도 형씨, 동생씨는 없다. 상대방을 부를 때는 이봐 형씨,라고 불러야 한다. 이봐,는 상대방을 조금 낮춰 부르는 마이고, 형씨는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 같은데 그런 두 언어를 동시에 쓴다. 그래서 형씨라고 불리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이봐, 형씨.


 나는 안 좋은 기분으로 뒤를 돌았다. 하지만 나를 부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수구 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형씨, 여기야. 라며 우리가 보통 내는 소리보다 음역대가 낮은 소리가 났다. 소리가 작다는 말이 아니라 어른이 말하는 소리인데 음역대가 낮았다. 잘 설명은 할 수가 없는 소리였다. 설명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건 순전히 나의 문제다.


 이런 문제가 나를 늘 괴롭힌다. 애매한 건 내내 피해왔기 때문이다. 설명을 헤야 하는 사람의 눈을 보며 제대로 설명을 해줘야 할 때가 있었지만 나는 그냥 피하기만 했다. 반드시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설명을 해줄 것이다. 굳이 내가 나서서 잘하지 못하는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이 가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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