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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y 01.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77

4장 1일째 저녁


77.

 서. 걱. 서. 걱.


 귀에 증폭 트랜스미션을 달아 놓은 것처럼 채소를 써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몹시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치아를 벽돌에 갈아대는 소리만큼 듣기 싫었다. 마치 소머즈가 된 기분이었다.


 소머즈가 된다면 듣기 싫은 소리도 이렇게 크게 들리니 스트레스가 심했겠군.


 얇은 쑥갓을 썰어도 그 소리가 바로 확성기에서 빠져나온 소리처럼 귓전에서 들렸다. 채소를 썰었던 오른손에 들린 칼을 왼손으로 옮긴 다음 오른손 검지의 끝으로 귀안을 고집스럽게 후볐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팔팔 끓고 있는 우동에 쑥갓과 채소들을 넣은 다음 냄비 채 들고 식탁에 앉았다. 냉장고 안에 썰어놓고 매일 먹는 생양파가 담겨있는 락앤락 통을 꺼냈다. 마트에서 3캔을 사들고 온 칼스버그도 한 캔 꺼냈다. 이제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는 안도감에 마동의 표정은 안정돼 보였다.


 자 이제.

 식사를 하려는데 잠시 동안 자신의 맞은편에 누군가 앉아있다면 지금 자신의 마음이 조금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어제의 사라 발렌샤 얀시엔을 떠 올렸다. 그녀를 생각하면 마동의 페니스는 자동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바닥을 들어서 바라보았다.


 이 손으로 그녀를 만졌는데.


 손끝으로 전해지던 어제의 감각적 기억은 사라져 갔다. 촉감은 기억에서 제일 빨리 떨어져 나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동은 휴대전화를 사운드 독에 연결 한 다음 음악을 틀었다. 벵엔 올룹슨의 스피커는 거실의 공간을 풍부한 음량으로 채웠다. 노래는 ‘거울잠’이라는 무명가수의 ‘세상의 끝’이라는 노래였다. 이미 오래전에 나왔다가 사라진 가수와 노래다. 인기가 없었다. 요즘 인터넷으로도 검색이 되지 않는 노래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는지 행방을 모르는 가수가 되었다. 이 그룹은 강한 음악을 하는 록밴드 형식의 가수였는데 이 노래 하나만은 잔잔히 흐르는 록발라드로 불렀다.


 ‘어제는 세상의 끝 세상의 끝 이미 세상은 끝나버렸어’라는 후렴구가 계속 반복이 된다. 내용은 잘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세상의 끝’이라는 노래를 영어로 된 음반으로 발표를 하고 활동을 했다. 내용이 꽤 초현실적이고 노래 코드 진행방식도 일반 노래에서 많이 벗어났다. 그들은 오래전에 미국 진출을 앞두고 실험적으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비틀스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외면을 받았다. 벌써 4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동은 이 노래에게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동도 알 수 없지만 이 노래를 늘 듣고 있다.


 ‘우리는 결국 어두워지는 하늘 밑에서 세상의 끝을 맞이하려 하네

 으깨진 새들의 날개와 신경질적인 여자들의 분노

 삶을 팽배히 지배하는 목 없는 자들의 소리 없는 비명

 나는 죽음이 느껴져 죽음이 느껴져

 움푹 들어간 네 눈이 보여

 그들은 전부 이곳을 삼켜버릴 거야

 헤테로피아를 만들고 싶어

 이곳은 사라지겠지 사라지겠지

 세상의 끝에 가면 우리는 무너지고 마네

 무너지고 마네 무너지고 마네’


 라는 노래가 가사가 죽 흘러나오고 허밍 부분이 나온다. 노래는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노래였다. 마동은 어쩐 일인지 여름에 이 노래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겨울의 노래를 듣는 것만큼 여름에 많이 듣는 노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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