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Feb 29. 2024

그녀의 도서관 9

단편소설


9.


단순한 문장을 쓰지 못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도서관에서 많은 수는 아니지만 매일 보는 나에게 인사를 건넸고 나 역시 그들에게 목례를 했다. 그들과 잠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듣는 쪽이 더 많았다. 나는 필요이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지만 단순한 문장을 위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20대 후반의 사람들로 공부에 대한 열정과 알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녀를 찾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며 불안했다. 흐린 날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랐지만 언제나 나의 바람은 보이지 않는 칼날에 싹둑 잘리고 만다. 그들에게 전달받은 말을 나는 나름대로 정리를 하여 공책에 적었다. 거기에는 시간도 없고, 바람도 없는 기묘한 모양의 글자만 누워 있었다.


거울을 보는 그녀를 생각하자.

이가 없어서 웃지 않는 그녀를 떠올리자.

나는 가슴에 나의 오른손을 얹었다.

심장 박동을 타고 손으로 냄새가 하는 말을 듣자.

짙고 진한 그녀의 말을 한다.

어딘가에 있는 그녀는 지금 나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아니,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집에 조에게서 편지가 한 통 와 있었다. 이런 시대에 편지라니. 조는 항상 그렇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났다. 조는 능소화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썼다. 능소화가 등의 피부를 뚫고 올라올 때의 느낌 같은 것을 써 놨다. 조는 글을 잘 적는다. 마치 피부가 벌어질 때 그 고통이 나에게 전달되는 것 같다. 나는 조의 편지를 읽는 것이 책을 읽는 것보다 좋아한다.


책은 탈고에 퇴고에, 거치고 거쳐 만들어지니까 누구나 봐도 되는 내용이 빼곡할 뿐이지만 조의 편지는 한 번에 써버린 글이라 나만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좋다. 조의 문장은 독특한데 읽기가 편했다. 조는 지금 수녀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조의 능소화를 아무에게 맡길 수 없어서 조는 믿을 만한 곳에서 능소화를 맡겨야 했다. 조가 보낸 편지 봉투가 아일랜드 발이었다. 아일랜드 서부 킬키뉴어 부근의 한 수녀원이라고 했다.


조가 보낸 사진을 보니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했다. 마음에 들었다. 바다가 있고 집들은 전부 만화 [빨강머리 앤]에서나 볼 법한 집들이었다. 대부분 5, 60년은 넘어 보였다. 100년이 된 것 같은 집도 보였다. 시대를 역행하는 도시 같았다. 조와 어울렸다. 조는 그곳의 한 수녀원에 있다고 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되고, 지내다 보면 모든 소박한 음식이 맛있다고 했다. 그래, 나는 컵라면이 맛있다. 컵라면은 소박한 음식이다.


오늘은 꿈에서 조의 능소화를 보았다. 주황색과 분홍 빛을 띠는 능소화는 아름다웠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색이 있다니. 이런 색을 지닌 능소화가 조의 등에서 피어났다. 조는 능소화가 죽지 않고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혈액을 열심히 능소화에게 먹였다. 무럭무럭 혈액을 공급받고 자란 능소화는 주황색과 분홍의 빛을 띠었다가 붉은, 좀 더 붉은색으로 번져갔다. 마치 뜨거운 한 여름의 노을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긴 티브이 광고가 똥이야. 광고라도 보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라고 시작한 두 번째 편지지는 그곳의 티브이 광고에 관한 이야기가 잔뜩 적혀 있었다. 그러나 조의 편지를 읽을수록 그 한적하고 고요하고 적막한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이나 조의 편지를 침대에 누워서 읽고 또 읽었다. 조의 편지 속에는 세계가 있었다. 나는 그 세계에 발을 들이고 싶었다. 그곳에서도 도서관이 있다고 했다. 멋진 일이다. 물론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거의 없을 테지만. 수녀원이 있는 세계의 도서관. 그녀와 그 도서관으로 가는 것이다. 편지를 읽다가 잠이 들었고 나는 꿈에서 조의 아름다운 능소화를 보게 되었다. 조의 능소화를 정성스럽게 깎는 수녀의 입 속에 이는 하나도 없었다.




사서가 도서관 입구부터 뭔가를 붙이느라 분주했다. 시립도서관의 지원이 끊겨 도 이상의 경영이 어려워서 한 달 이후에는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이었다. 이로서 나의 좁은 세계가 더 줄어들고 있다. 나 같은 인간은 이 세계에서 쫓겨나기를 바란다.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또는 집 안으로 몰아넣는다. 꼭꼭 넣어서 집 안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도서관 같은 좋은 장소는 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일까. 도서관 하나쯤 세워둔다고 해서 사람들이 싫어하지는 않을 텐데. 거리를 돌아다녀 봐도 비슷한 가게가 계속 붙어 있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휴대폰 파는 곳 옆에 휴대폰, 계속 휴대폰을 팔고, 카페와 카페 그리고 카페들이 가득할 뿐이다. 서점이나 레코드 가게, 도서관 같은 곳은 몽땅 사라지는 이상한 시대다. 21세기는 나를 내쫓으려 한다. 맞지 않는 인간은 가차 없이 보낸다. 그녀가 사라진다고 한들, 나 하나 정도 사라진다고 한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 시대다. 그런 시대의 중심에 그녀와 나는 서 있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의 도서관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