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175.
평지가 이어져 최원해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주위는 무성한 풀과 나무, 나무와 나무가 우거져 있고 그 사이를 사람 두 명이 지나갈만한 길이 죽 뻗어있었다. 최원해는 오르막길에서 숨이 차오르는 것보다 덜 했지만 말하는 중간중간 숨이 가빠서 참아가면서 자신의 대학교 시절에 등산동아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숲 속의 중간쯤에 들어서니 풀벌레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마치 생명이 끝나가는 미어캣 떼가 합창을 하듯 한꺼번에 숲의 어느 부분에서 풀벌레 소리가 요란스럽고 무참히 들렸다. 식수로 사용되는 저수지를 끼고 빙 둘러싼 산에는 작은 동물들이 있었고 저수지에는 민물고기들과 자라가 서식하고 있었다. 잡아들였다가 적발되면 현장에서 검거가 된다. 숲에는 뱀도 많았다. 아파트 단지의 스피커를 타고 숲으로 등산을 갈 때 뱀을 조심하라는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침엽수의 나무는 무더운 날을 여러 해 견디면서 나름대로 이 계절에 적응을 끝냈다. 끝을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수많은 침엽수는 공진화현상을 거쳐 활엽수와 함께 저수지 옆에서 그들 나름의 방식을 터득했다. 진화를 하여 지금의 모습까지 왔다.
덕분에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나무의 기운을 뿜어 내줄 수 있었다. 나무는 세계로 가지들을 뻗고 장마기간에 우후죽순으로 내리는 비를 흠뻑 빨아들여 숲을 한층 더 나무의 세계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녹음은 어느 때보다 짙어지고 숲은 확고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 보이는 마른 뇌우.
바람이 대기를 가르고 숲 속의 나무들을 훑고 지나갔다. 스르륵 쿠르릉. 기이한 바람의 소리였다.
바람소리?
바람소리가 들렸을 때 처음에는 그것이 바람소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바람소리가 여러 번 들렸지만 바람소리라고 인지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마동의 귓전으로 들어오는 바람소리는 스산함을 넘었다. 겨울의 칼날 같은 바람보다 더했다.
한여름 밤의 바람소리가 왜 이토록 스산하게 들릴까.
그날(사라 발렌샤 얀시엔을 만난 밤)의 바람소리도 스산했다. 바람소리가 슉슉하며 몇 번 들리는 동안 바람소리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꽤 여러 번 스르르륵하며 귓전을 울릴 때 그것이 소리로서의 완연한 무기체를 이루었고 마동의 귀에 들어왔을 때 더욱 완벽한 바람소리가 되었다. 소리는 나무와 나무사이를, 가지와 가지사이를 훑고 부드럽게 다가와 마동에게 내려앉는 보편적인 바람이 아니었다.
바람은 포향을 지녔고 어둡고 광대한 자연이 허물어지는 소리였다. 잠자고 있던 포식자의 본능에 점화를 울리는 소리였다. 바람소리가 들리자마자 마동은 사라 발렌샤 얀시엔을 떠올렸고 더불어 그날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지금과는 다르지만 그때의 바람소리, 치누크가 몰고 온 초현실의 세계가 다가왔다. 저 멀리 마른번개는 빙영을 자아내며 크게 하늘에서 성난 모습으로 바닥에 내리 꽂혔다. 대단했다. 저렇게 큰 번개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묘해졌다. 이상했다. 마치 공중으로 몸이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최원해도 나처럼 이럴까. 아니다, 최원해는 변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최원해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마동은 자신의 배속에 무엇인가 꾸물거리는 액상물질이 가득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배 안에서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떠한 살아있는 물질이 기어 다니고 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복통이 일어날 것만 같았고 눈앞에 펼쳐진 숲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창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공기의 이완과 수축이 몇 번 반복되더니 보는 앞에서 그대로 부풀어 올랐다. 바람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면서 마동의 몸을 짓눌렀다. 바람은 냉정했고 차가웠다. 차가운 겨울의 바람이었다. 바람에 살이 닿으니 따갑고 견디기 힘들었다. 피부가 새로운 표피로 덮여 공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온몸의 세포가 일어났고 살려달라고 외쳐댔다. 숲 속의 나무들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공기가 뒤틀어지고 공간이 비틀어졌다. 벌어진 공간과 공기의 틈으로 불투명한 공기층이 틈을 벌렸고 마동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거부할 수 없고 저항조차 불가능했다. 마동의 몸에서 축축하고 기분 나쁜 돌기가 만져졌다. 최원해가 흘린 땀을 빨아먹은 것처럼 더럽고 불쾌하고 축축한 돌기였다. 돌기는 이내 딱딱하고 얼음처럼 차가워졌으며 시간과 공간을 뒤 흔들기 시작했다. 기억나지 않는 오래 전의 기억이 액체와 기체의 중간상태에 머물러 있는 물질처럼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가 바람소리로 인해 순식간에 깨어나서 저수지의 표면을 갈라놓으며 마동의 수면파동을 뒤집었다. 불안과 희망의 해체가 마동의 눈앞에 보였다.
입을 벌리자 그 속에서 수십 개의 자줏빛 포자가 흘러나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