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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y 26. 2024

56. 전투태세 -1

소설


1.


우리는 졸업하기 전에 학교 교지와는 다른 단행본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그것을 꽤 많은 조사와 우리 모두가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아야 가능한 기획이었다. 우리는 없어지거나 사라져 가거나 또는 잊힌 우리나라의 만화 주인공들을 한데 모으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종규가 제안을 했고 기철이도 득재도 그리고 진만이도 개구리 역시 모두 찬성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5개월 가까이 자료를 모으고 각자 맡은 파트를 준비해서 정리를 했다. 실은 5개월보다 더 걸린 것 같았다. 종규가 모든 삽화를 도맡았다. 단행본은 중편소설 한 권 분량이어서 학교에서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상후의 아버지에게 지원을 받았다. 지방신문 한 편에 실리기 시작했고 어이없게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서 단행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모든 작업이 끝났을 때 3학년 가을로 접어들었다.




[단행본 제목: 전투태세]


“자 스타트 버튼을 누르게나.”


 관제탑 안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쩌렁쩌렁했다. 노쇠가 심한 김 박사지만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이크에 메마른 입술을 갖다 댔다. 목소리에 세월의 비정함이 묻어 나왔지만 비정함이 깃든 목소리에는 힘이 강하게 들어가 있었다. 태권브이의 중심부 조종실에는 영심이와 하니가 헬멧을 쓰고 제어기를 움켜쥐고 앉아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홀로그램으로 영심이와 하니는 태권브이의 메커니즘을 좀 더 효율성 있게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오래전 훈이와 영희의 조종방식에서 벗어났지만 그동안 김 박사와 그녀들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귀결이었다. 남자가 중심이 되고 여자가 보조를 해야 하는 방식에서 벗어났다. 영심이와 하니, 그녀들이 사수와 부사수가 되어 태권브이 조종석에 앉아 있었고 기어를 넣고(역시 홀로그램과 화면에 터치를 하는 수준으로) 태권보이를 출격시키려 하고 있었다.



#

하니는 강동 구청 뒤편 성내동 562번지에서 태어나 죽 그곳에 살면서 마라토너의 길을 걸었다. 은퇴하여 보스턴마라톤대회에도 간간히 출전했고 일본에서 열리는 마라톤에 참가하여 취미를 즐기기도 했다. 그녀는 은퇴 후 여러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하니는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인재가 되지 못한다고 거절했고 자신만의 세계를 즐기며 나름대로의 삶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하니는 주름이 늘었고 여러 명의 남자들과 만났다.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마르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깅을 매일 하던 탓에 늘씬한 몸을 유지했으며 그 나이에 비해 탄력 있는 피부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하루가 무료하고 권태로웠다. 가끔 나애리가 아이와 함께 찾아와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애리는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것이 나애리가 피곤하고 살이 찌는 이유였다. 어릴 때는 나애리가 그렇게 미웠는데 시간은 모든 것을 무마시켰다. 애리가 한창 수다를 떨다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가고 나면 무료함은 더했다. 하니는 이 굴레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던 중 태권브이 조종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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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심이는 대학교 진학 후 기계학도로 전과를 감행했다. 결국 영심이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왕경태와 결혼을 했다. 왕경태를 따라서 기계공학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그녀가 빠져들어 버렸다. 차갑고 딱딱한 기계라는 메커니즘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탈이라는 금속성 유려함의 매력은 점점 마력으로 영심이를 끌어당겼다. 결국 영심이는 기계공학도로 기계의 세계에 완전하게 흡수되어 버렸다. 그녀는 남자들이 비해 기계적인 면에서도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기계가 가지는 철학과 미학에 영심이는 심도 있게 다가갔다. 오랫동안 기계를 만지고 공부해야 한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영심이는 왕경태와 함께 꾸준하게 운동을 했으며 포니테일을 고수하던 영심이는 안경을 벗었고 가슴과 골반이 위로 올랐고 키도 왕경태보다 커졌다. 영심이는 미인이라고 부를 만한 외모를 지녔고 메커니즘에 대한 지식도 풍부했다.



#

태권브이 조종사를 공개모집 했을 당시 여자들은 몇 명 없었지만 하니와 영심이는 최종심사까지 남았다. 남자들도 다 떨어져 나간 힘든 관문에도 마지막까지 두 사람은 남게 되었다. 통과하는 시험은 혹독했고 힘들었다. 중력을 거스르는 시험부터 기계적 오류를 순간적으로 대처하는 수학적 방법까지 다양했고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들이 결국 태권브이 조종사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합격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태권브이를 조종하기에는 훈련이 더 혹독했다. 무중력상태에서의 훈련, 과학이론 사긴에 등장하는 각종 법칙에 반하는 몸의 상태와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체력훈련, 복잡한 수식에 대한 이해와 빠른 접근 방식 등, 수많은 훈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체력과 정신력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던 하니와 메커니즘에 한걸음 다가갔던 영심이가 그동안 훈련을 이겨내고 드디어 태권브이 출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훈이와 영희의 중심과 보조라는 개념적인 부분에서 벗어나게 한 그녀들이었다. 그녀들이 지금 태권브이 조종석에 앉아 있었고 김 박사와 신호에 태권브이를 출격시키려 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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