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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기까지였어. 저 빈병에 무엇을 넣어서 먹어본 적은 없었어. 분명 실망할 테니까. 그렇게 하나씩 오랜 시간 동안 모이기 시작한 거라구.”
그녀는 마동의 이야기를, 동화를 듣는 아이처럼 흥미 있게 들었다. 는개는 마동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카스텔라를 처음 맛본 사람처럼 신기하기만 했다. 그 점은 마동도 마찬가지였다.
“대학교시절 교양과목으로 사진영상학을 들었어요. 교수님이 짐 자무쉬의 팬이었어요. 클래스에서 단체로 영사기를 돌려 ‘천국보다 낯선’을 봤어요. 지금보다 생각이 복잡했고 질문이 많았을 때 이 영화를 접했어요. 당시에도 시간이 나면 전 당신을 찾는 일에 시간을 보냈거든요. 공허했어요. 무척 공허했어요. 그 공허함은 내 의식을 몽땅 분열시켜 버릴 듯했어요. 사람이 이렇게 공허함을 잔뜩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놀랐어요. 감정이라는 것이 상승을 했다가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계속 꺼져가는 것이었어요. 영화를 보고 드는 감상평을 적어내라고 해서 영화를 통해 드러난 내 마음의 공허함에 대해서 적어냈는데 교수님이 방으로 조용히 불러서 정신과 상담을 권유해주시기도 했어요.” 는개는 수줍게 웃었다.
그녀는 아이스크림 집의 가짓수처럼 31가지의 웃음을 지니고 있었다. 는개는 더 이상 마동에게 잔을 권하지 않았다. 고요하게 움직여 조용하게 혼자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마동에게 회를 먹여달라고 손짓을 보냈다. 마동은 젓가락으로 접시 위의 쥐돔 회를 집어서 간장에 살짝 찍어서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진정 행복한 모습으로 받아먹었다. 눈초리가 밑으로 한없이 떨어져 눈썹달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천국보다 낯선’ 속에는 공허함이 가득했다. 영화 속의 에바는 영화가 던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예뻤다. 애써 의상과 분위기로 가리고 있었다. 천국이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공간일지도 몰랐고,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쫓아서 살아가는 게 인간의 삶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빅 피쉬의 에드워드처럼 되지는 못 한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 것이다.
마동은 는개와 와인 두 병을 비우고 서로 회를 조금씩 먹었다. 그녀는 냉장고의 문을 열고 그 속에 들어있는 소주 한 병을 꺼내서 선반 위에 있던 마동이 먹다 남은 와인을 들고 테이블로 왔다. 집에 남아있는 술로 그녀는 조금 특별한 술을 만들었다. 먹다 남은 와인과 소주를 섞었다. 그녀는 가스레인지에 물을 약간 끓이고 선반에서 오래된 꿀을 꺼냈다. 숟가락으로 딱딱하게 굳은 꿀을 저어서 몇 수저 떠서 끓는 물에 풀었다. 와인과 소주를 섞은 술에 끓인 꿀물을 넣고 얼음을 넣어서 저어주었다. 이름 없는 술이 만들어졌지만 맛이 꽤 좋았다. 그녀는 요술쟁이였다. 그런 제목의 영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은 나지 않았다.
“술의 이름을 지었어요. 맞춰봐요.”
“술에 이름이 있어?”
“그럼요, 이름이 없는 것은 없어요. 모두가 이름이 있어요. 이름이 있는 것들은 모두 의미가 있어요. 호텔이 아늑한 이유도 이름이 있어서 그래요. 배가 멋진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그래서 택시가 엉망이군”라고 마동이 말했다.
“맞아요. 빙고!”
“자, 이제 이 술의 이름이 뭘까요?”
“이 밤의 독주?”
“그게 뭐예요(웃음)? 이건 독주가 아니에요. 꿀이 많이 들어가서 알코올 맛은 많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바닥을 비워갈 때쯤에는 서서히 취하게 됩니다. 누구랑 닮은 거 같지 않아요?”
는개의 말에 마동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 술은 마. 동. 주. 입니다.”
“그게 뭐야.”
노트북에서는 ‘천국보다 낯선’이 보는 이들이 없음에도 씩씩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바는 월리가 사는 곳에서 떠났다. 는개의 몸도 술에 조금씩 잠식되어 가는 듯 그녀의 볼은 제철의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 기분 좋은 수채물감으로 칠해 놓은 듯 보였다. 그 모습이 평소의 는개의 모습에서 벗어나서 마동은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는개가 놓치지 않았다.
“저기 당신을 위해서 매운탕을 맛있게 끓이려고 했는데 와인을 많이 마셔서 안 되겠어요. 지금 상태로 끓이다가는 매운탕인지 잡탕인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내 경력에 오점을 남기긴 싫어요.” 는개는 붉게 물든 얼굴에 미소를 만들었다.
웃는다. 예쁜 얼굴이다. 예쁜 얼굴의 그녀가 내 앞에 있다. 바로 코앞에. 믿기 어려운 현실이.
는개가 입어서 크게 보이는 마동의 리바이스 티셔츠는 그녀의 옷처럼 보였다. 헐렁해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녀는 정말 여자마술사처럼 마동의 옷도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처럼 보이게 했다. 는개는 고개를 숙일 때마다 그녀의 가슴골이 드러났다. 그녀가 와인 잔을 식탁 위에 놓아두고 마동의 옆으로 왔다. 노트북 속의 월리와 에디가 카드로 딴 돈을 들고 클리블랜드로 무작정 떠났다. 에바를 만나기 위해. 계획 같은 건 없다. 그들에게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