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
그녀에게는 은은한 비누향이 번졌다. 그 향이 좋아서 나는 그녀의 곁에 고여 있는 물이 되고 싶었다.
바람은 도륙된 하얀 잎도 휩쓸고 가버렸다. 바람은 죽어버린 마음까지도 몽땅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수평적 구도를 가지는 것들이 바람을 잡고 수직 하는 구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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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마치면 나는 자취방으로 빠르게 왔다. 아이들에게서 나의 걸음이 빠르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비가 와서 빨리 걸어왔을 뿐이다. 몸에 묻은 계절의 빗방울을 털지도 않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맥주를 한 캔 빠르게 마셨다. 맥주가 몸속으로 퍼져 들어가는 느낌이 기분을 좋게 만든다. 마신 캔을 구석으로 던졌다. 쓰레기통에는 맥주 캔이 탑처럼 쌓여 던진 캔은 쓰레기통 밖으로 튕겨 나왔다. 캔을 던져 바닥에 닿는 소리가 좋다.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찌그러지는 소리가 찌꺼기로 가득한 영혼을 가득 울렸다.
자취방은 자취촌에서도 제일 작은방으로 버릴 수도 없는 침대 하나에 옷장이 하나뿐인 그런 방이었다. 나는 이런 곳에서도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에 매일 놀라고 있었다. 생활이라고 해봐야 겨우 잠을 자고 잠이 깨면 일어나서 학교에 가는 단순한 반복이 전부였다. 목욕은 목욕탕에서, 식사는 학교 구내식당을 애용했다. 옷장에 옷은 몇 벌 없었고 옷이 놓일 자리에 책이 몇 권 누워있었고 방바닥에도 책이 여러 권 굴러다닐 뿐이었다. 귄터 그라스의 책 3권이 있었고, 김승옥의 단편집과 조지 오웰의 1984, 뒤팽을 탄생시킨 에드가 알렌 포의 소설과 헤밍웨이의 책이 방 안에 굴러다녔다.
“넌 한국 소설은 잘 읽지 않는구나.”
그녀와 좀 친해진 다음에 들은 말이었다. 그녀를 보면 김승옥의 단편 중에 ‘차나 한 잔’에 나오는 주인공 ‘이 형’이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끔찍이 사랑하는 아내를 때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드는데, 거기의 아내가 떠올랐다. 꿈을 자주 꾸지 않는데 꿈을 꾸면 꿈속에서 ‘이 형’ 나타났다. 다른 신문사에 만화를 팔아먹을까? 나에게 물었다. 나는 결과를 알고 있기에 그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왜 넌 웃기만 하냐고? 웃음기 걷힌 얼굴의 ‘이 형’이 나에게 말했다. 그의 모습은 내내 아슬아슬하고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이 형’은 유머를 잃지 않았다.
방에는 건축 도감의 책도 몇 권 있었다. 안도 다다오의 책과 꼬르뷔지에, 안토니오 가우디의 책도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있고 선배에게서 빌린 것도 있었다. 수업을 마치면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집으로 와서 침대에 벌렁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허리가 아플 때쯤 일어나서 맥주를 한 캔 마셨다. 누워서 다 마신 캔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맥주를 혓바닥을 내밀어 받아 마셨다. 혓바닥에 닿는 느낌이 좋다. 방울이 떨어지는 속도가 줄어들수록 진실은 빈약해졌다. 캔 속에서 맥주의 피까지 빨아먹은 다음 누워서 아무것도 생각지 않았다. 아니, 생각이 흐르는 대로 생각을 했다. 적극적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또 허리가 아플 때 일어나서 노래를 틀었다. 더블테크의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