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 난무하는 도로
5.
출발하고 두 번째 신호에 섰다. 그 근처에는 강아지를 치료해 주던 동물병원이 있다. 내가 키웠던 강아지를 그 동물병원에서 치료했다. 나이가 들고 병이 깊어 얼마 전에 죽고 말았다.
개와 인간의 관계는 무엇일까. 왜 하필 개라는 동물일까. 돼지도 아니고, 표범도 아니고, 토끼도 아니고 어째서 개일까. 개는 어쩌다가 인간화되어서 인간의 곁으로 왔을까. 인간과 개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큼 복잡하다. 어쩌면 인간의 관계보다 더 복잡할지도 모른다. 유순한 눈동자로 24시간 내내 주인만 바라보는 개에게 이만큼의 사랑을 줬으니 오늘은 됐다고 할 수도 없다. 개는 그런 존재다.
인간처럼 배신하지 않는다. 인간처럼 요만큼 여지를 두고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인에게 한 번 준 사랑을 배신하지 않는다. 개는 그렇다. 개는 하루 종일 혼자 있으면서도 주인을 보는 그 순간을 위해 혼자인 시간을 차고 견뎌낸다. 이걸 설명할 수 있을까. 개는 주인과 함께 목줄을 걸고 산책하는 순간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가진다. 명품을 바라지도 않는다. 여행을 가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저 주인만 있으면 된다.
나이가 들어도 마냥 아이 같기만 하다. 늘 주인을 찾고 아침에 눈 뜨면 주인의 얼굴을 핥고 훑는다. 나이가 들어 병이 깊어 죽는 그 순간까지 개는 주인을 보며 느리지만 꼬리를 한두 번 흔들고 눈빛을 교환한 다음 죽는다. 나의 개를 데리고 마지막까지 찾았던 동물병원이 저곳에 있다. 개는 병원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눈치는 빨라서 산책하러 가는 건지, 병원에 가는 건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언제나 나를 좋아해 주었고 늘 나의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랬던 녀석이 죽었을 때 나의 내부의 어떤 부분도 같이 죽었다. 가족이 죽었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개와 인간의 관계는 무엇일까.
신호가 바뀌었다. 벌써 십 년이나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도로를 운전하고 있으며 언제나 비슷한 시간에 같은 신호에 걸린다. 항상 내 앞에서 신호는 바뀐다. 딱히 그게 싫은 건 아닌데 언젠가부터 맨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게 부담이 된다. 수동기어라 출발도 느리고 기어 변경도 자동기어 차만큼 빠르지 않다. 고작 1초도 안 되는 시간인데도 좀 느리다 싶으면 뒤에서 빵빵거린다.
다른 자동차들처럼 앞질러 가면 될 텐데 경종을 울리는 차들이 있다. 이해되지 않는 차가 버스다. 버스가 그러는 건 폭력이다. 시내에서 버스가 1초 정도 빨리 가기 위해서 빵빵 거리는 게 이상하다. 내가 조금만 이해타산을 따지는 사람이라면, 내가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버스를 신고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폭력이 만연하다는 것은 도로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아니 도로에서 더 잘 알 수 있다. 도로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무섭다. 인간은 언제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이유가 평화를 위해서다. 폭력을 없애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을까. 가정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폭력이 흘러넘쳐 도로까지 번져 나왔다.
어쩌면 매일 비슷한 시간에 같은 도로에서 같은 신호에 걸리는 이유는 평행우주 때문이지 않을까. 평행우주에 나와 똑같은 내가 또 다른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거기서도 매일 이 같은 반복이 일어난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그곳의 세계와 이곳의 세계가 그만 겹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의 세계로 가고, 그곳의 내가 이곳의 세계로 와서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신호에서 비슷한 행동과 경험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매일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르다. 어쩐지 한의원이 열어 놓은 문이 좀 달라졌다던가, 신호가 평소보다 좀 길게 느껴진다던가.
영화에서처럼 평행우주의 다른 세계가 완전히 다르지 않은 건 실체 평행우주에서는 과거로 가서 무엇을 바꾸려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타임 루프를 할 수 있는 미래에서도 그런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평온하게만 보이는 태양계에서 가끔 지나가는 소행성의 충돌이나 빛의 소자가 분산되거나 해서 평행우주가 서로 겹치는 일이 발생했음에도 세계가 비슷하므로 좀 이상하다고 느낄지는 몰라도 그냥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출근길에 죽은 나의 강아지와 똑같이 생긴 강아지가 나를 따라온다면 이야기는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