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32.
제일 사랑하는 사람 -
만약 이 사랑이 영원하길 원하신다면
날 위한 사랑 변치 말고
이번 생엔 나와의 꿈만 꿔 주세요
난 평생 당신의 사랑만 있으면 되니까요
당신과 함께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서
당신이 다시는 팔을 빼지 않길 기도하니
너무 따뜻하고 고운 이 손에
끝없는 사랑이 스며들고 있답니다
만약 이 사랑이 영원하길 원하신다면
날 위한 사랑 변치 말고
이번 생엔 나와의 꿈만 꿔 주세요
노래가 울려 퍼지자 그녀의 눈에서는 구멍이 더 크게 뚫렸는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김 씨 아저씨에게 노래를 꺼달라고 하려는데 그녀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어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노래는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또는 나의 마음을 읽어 내려고 했다. 나는 말없이 소주만 마셨고 그녀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숲’에서의 시간은 우리를 그곳에 영원히 머무르게 할 것 같았지만 어김없이 피어나는 아카시아의 생명처럼 ‘숲’은 영업을 마감하는 시간이 다 되어 갔다. 술을 너무 마신 나는 자취방으로 어떻게 왔는지 몰랐다. 어렴풋하게나마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기말고사 끝이 나고, 시험이라는 것이 끝남과 동시에 겨울이 모질게 찾아왔다. 야상과 비슷한 겨울옷이 한 벌 자취방의 작은 옷장에 구겨져 있어서 나는 난방이 잘 안 되는 방 안에서 그것을 껴입고 잠이 들거나,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보거나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기형도의 ‘소리의 뼈’를 읽었다. 그 교수가 기형도 자신이 아니었을까. 읽고 나니 침묵의 힘이 느껴졌다.
그 묵직함의 무게감.
하지만 침묵하는 건 거짓말처럼 세상에서 하지 말아야 할 가장 나쁜 짓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더 우울했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입김이 나왔다. 나는 시험도 모두 끝나고 학교의 일정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음에도 고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직 남아 있어서 나는 그녀를 두고 고향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수업은 없었지만, 낮과 오후에는 강의실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볕을 쬐며 엎드려 잠이 들었다.
배가 고프면 구내식당에서 국수를 한 그릇 사 먹었다. 학생들이 빠져나간 학교에서 다른 메뉴는 만들지 않았다. 선택의 폭이 없었다. 오로지 국수밖에 팔지 않았다. 식당에서 파는 국수는 컵라면값과 비슷했지만,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오백 원을 더 주면 곱빼기라서 그 양은 엄청났다. 맛이라는 건 먼 나라의 이야기였지만 내 입맛에는 괜찮았다.
그저 허기를 때우는 역할을 하는 정도의 국수였지만 나에게는 일종의 안온감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구내식당에는 술을 팔지 않는다. 보온병에 소주를 부어서 들고 가서 국수와 함께 천천히 그것을 마셨다. 먹고 나오면 배도 부르고 조금 달라 보이는 학교 풍경이 좋았다.
기말고사가 전부 끝나는 날이 오면 학교 식당은 음식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식당의 매점도 늘 오픈하지 않고 산발적으로 장사를 하게 된다. 하지만 국수가 없더라도 컵라면을 먹으면 된다. 식당에는 단무지가 있는데 컵라면은 김치보다 단무지에 먹는 게 더 맛있었다. 컵라면은 양은 국수에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물을 많이 부어서 국물을 후루룩 마시면 허기가 해갈되었다.
책을 읽다가, 앉아 있다가 지겨워지면 어슬렁어슬렁 학교 안을 거닐다가 의상과가 있는 건물로 걸었다. 혹시 그녀를 볼 수 있을까 하며 기웃기웃하곤 했다. 그녀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분명 재봉실 안에서, 재봉틀 앞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 놓고 열심히 박음질을 연습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재봉실에서 나와서 내 눈에 띈다고 하더라도 나는 멀리서 그녀를 보고는 그냥 와버렸을 것이다. 눈이 마주친다면 고개만 까닥하며 인사 정도를 할 것이다. 비록 그 정도의 마주침이라도 나는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