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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01. 2024

그리운 날도 사라질 날도 34

소설


34.


 선배는 이반이다. 사랑하는 또 다른 이반이 있다. 내 손은 땀 때문에 한없이 축축해졌다. 기도가 끝나고 우리는 조용히 식사했다. 손을 잡고 기도를 하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로 선배는 밥을 먹을 때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선배는 휴학 과정을 밟았고 다음 주면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의상에 관한 책과 그것에 관련된 잡지를 들여다봤으며 재봉틀 앞에 앉아서 박음질을 열심히 했고 스케치북에 자신만의 의상 디자인을 완성해 나갔다.        

       

 모두가 비슷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사람 대부분이 김춘수의 ‘촛불’에서처럼 촛불의 밑 부분이 어둡다는 것은 느끼지 못한다. 그녀와 선배 사이에서도 미저러블 한 기류가 있었지만, 겉으로는 잘 구워진 만두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다정하게 보여서 되려 나는 더 무력감을 등에 짊어지고 태어났는데 거기에 더 한 무게가 한 꺼풀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선배와 그녀는 나에게 집으로 가는 기간을 일주일만 미뤄 달라고 했다. 선배가 입대하고 나면 나도 집으로 갈 요량이었기에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해 이른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새벽에 전조도 없이 화가 난 신이 계절을 앞당겨 격분하여 눈을 마구마구 만들어서 세상에서 뿌리는 것처럼 상당한 양의 눈이 내렸다. 가을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퍼부었다. 방안에 외풍이 심해서 전기히터를 켜놓았지만 겨울 야전 상의를 껴입고 두꺼운 담요를 덮어야만 잠들 수 있었다. 잠들기 전까지 손을 후후 물어가며 책을 읽었다.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가 있었다면 조금은 추위를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입에서는 입김이 과하게 나와서 나는 놀랐고 그만큼 방안은 추웠다. 나는 반쯤 남아있는 소주를 들이켰다. 소주의 향이 달아나서 맛이 조금 이상했지만, 마실만 했다. 그래도 꼴에 술이라도 속으로 들어가니 알코올이 전해주는 따뜻함이 속에서 느껴졌다. 전기히터는 분명히 자취방의 전기세만 엄청나게 잡아먹고 제 역할을 조금도 하지 못하는 축에 속하는 고물이었다. 그럼에도 이것이 지금 내 손아귀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굽혀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전기히터 님이시여, 정말 고맙습니다. 실존을 알게 해 준 하이데거보다 더 고맙습니다. 하느님보다 더, 이렇게 추운 방에서 추위를 견디게 해 주셔서….’            

   

 추위를 탄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다. 추위 때문에 오는 고통을 살아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나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른 채 수마에 정신을 빼앗겼지만, 새벽에 몸이 너무 추워서 눈을 뜨고 일어나야만 했다. 전기히터는 꺼져있었고 침대에 걸터앉아서 숨을 쉬다 보니 입김이 담배 연기만큼 뿜어져 나왔다. 나는 현실감이 떨어지는 방 안에서 입김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입김을 계속 불었다. 하. 하. 후. 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모든 것을 잠시 잊고 그 순간은 신기한 동물을 발견한 것처럼 시간을 들여 입김을 불었다. 고르지 않은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은 방 안으로 뿌려졌고 곧이어 사라졌다. 입김은 마음속에 숨어있는 부끄러운 에고처럼 모습을 드러냈다가 아는 척 당하니 이내 사라지는 수줍은 모습 같았다. 꺼진 전기히터는 아무리 재가동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매머드와 같았다. 전기 스파크도 일지 않았다. 그대로 자신의 소명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힘들고 지쳐 보였다. 앉은 채 창문을 보니 하늘에서 무엇인가 나풀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닫혀있는 창밖으로 실루엣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비는 아니었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저건 눈이었다. 창문을 열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고철 덩어리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기름칠하지 않아서 굳어버린 양철 인간 같았다. 도로시가 있다면 기름칠을 해 줄 텐데. 나는 양손을 모으고 그 모은 손바닥을 호호 불며 겨우 일어났다. 거칠고 지친 소리가 났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처음 내리는 눈이었다. 때 이른 눈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눈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떨어지는 속도가 대단했다.


 초속 5센티미터보다 훨씬 빨랐다. 비에 불어난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흐름처럼 속도감 있게 눈은 낙하했다. 물처럼 떨어지는 눈을 나는 오래도록 지켜봤다. 계절을 잡아당겨 내려온 눈은 새벽 내내 내려서 발자국을 만들어 낼 만큼 쌓이기 시작했다.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알리는 신호였다. 이제 길고 긴 추운 나날들이 지속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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