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37.
푹푹 듣기 좋은 소리였다. 겨울에만 들을 수 있는 소리다. 듣기 좋은 소리는 세상에 몇 없다. 자취촌 근처에도 이렇게 큰 산이 있고 그 속에는 풍경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은 바다니, 산이니 하는 자연이라는 무제한의 것에는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길은 전혀 사람이 걸어 다닌 흔적이 없어서 인간이 생활하는 반경이 생각 밖의 일처럼 훨씬 크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계속 걸었다. 걷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다. 그럼에도 앞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계속 걸었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펑펑 내렸다. 두려움도 없었다. 방향 감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오솔길로 보이는 길을 따라 눈을 밟으며 걸었다. 시간이 아침 8시를 넘기고 있었다. 새벽 3시에 나와서 나는 다섯 시간을 걸었다.
세상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발가락이 무척 시리고 너무 아팠다. 발가락을 잘라내는 동사 환자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오솔길도 끝이 보이려고 했다.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그저 산이었다. 나무들이 울창하게 눈을 맞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숲이었다. 오솔길의 끝에 다다르니 삼 층 짜리 종교 건물이 하나 덩그러니 보였다. 하지만 외관상으로 무슨 종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건물 앞에는 비석이 하나 있었고 비석은 한문으로 쓰여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눈은 더 거세게 내렸다. 거수경례하듯 차광막을 만들었다. 보통 때는 그것이 차광막이었지만 지금은 눈을 막는 역할을 했다. 눈은 금세 손등에 쌓였다. 눈이 손등에 떨어져, 녹을 새도 없이 쌓여갔다. 손은 금방 얼어버렸고 나는 이 산속에 하나밖에 없는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문은 아주 컸고 깔끔했다. 요란한 무늬 따위는 없었다. 문은 말 그대로 더도 덜도 아닌 ‘문’이었다. 문은 까다롭게 문을 만드는 전문가에 의해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문 같았다. 손잡이가 없었다. 손잡이가 없었지만, 문은 그야말로 ‘문’다웠다.
나는 건물 앞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들은 모두 하얀색의 눈옷을 입고 있었고 가끔 새가 날아가면서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크고 작은 나무에 내려앉은 눈은 관객의 모습으로 나를 에웠고 관람하는 느낌을 받았다. 고요의 밀도가 굉장했고 눈 내리는 소리만 현실이 아닌 듯 들렸다. 낡은 스니커즈 운동화의 앞부분의 갈라진 틈으로 녹아들어 온 눈에 발가락들은 아우성치었다. 열 개 중에 두세 개는 감각이 없는 것 같았다.
동상. 잘리는 발가락. 지팡이.
환영처럼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눈이 내리는 동시에 세상은 거대한 냉동고처럼 변하려고 그러는지 몰려오는 추위가 대단했다. 내 몸이 추위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져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도 손이 시리고 입에 양손을 모으고 후후 불어도 전혀 열기가 손가락에 전해지지 않았다. 공기와 맞닿아있는 얼굴도 감각이 사라졌고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은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입김의 몇 배나 되었다. 코로 숨을 쉬는 대도 그 연기가 콧구멍을 통해서 용의 입김처럼 흘러나왔다.
건물에는 분명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삼 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의 꼭대기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지붕이 있었고 –모양은 이상하지만- 굴뚝같은 것이 보였는데 땔감을 태우는지 계속 연기가 올라갔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은 굴뚝의 연기에 닿아서 녹아 빗물이 되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가 닿아서 달달거리는 소리가 귓가의 모든 정적을 깨트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