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돼지껍데기를 조렸다고 먹으러 오라고 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엄마의 다른 요리는 다 좋은데 돼지껍데기로 하는 요리는 나는 먹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돼지껍데기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친구들과 연탄불에 돼지껍데기를 구워 먹는 걸 좋아한다. 아주 맛있다. 껍데기의 그 맛을 나는 안다. 참고로 나는 아무것도 찍어 먹지 않는다. 소스도 필요 없다. 과메기를 먹을 때에도 김이나 초장에 찍어 먹지 않는다. 그냥 과메기만 먹어도 맛있다. 그 정도로 비린내나 껍데기의 촉감을 좋아한다. 그런데 엄마의 돼지껍데기 요리는 먹고 싶지 않다.
엄마는 시장에서 돼지껍데기를 사 와서 직접 손질한다. 손질이 안 된 돼지껍데기는 가격이 저렴하고 양이 아주 많다. 그냥 시장 족발집에서 파는 조리가 된 돼지껍데기를 사서 먹으면 괜찮은데 엄마가 직접 손질한 돼지껍데기는 털이 덜 뽑혀 있다.
아니 이 정도면 먹을 만하겠네, 같은 생각이 점점 돼지껍데기 손질에서 털을 덜 뽑아도 먹어도 된다는 분위기가 강해지는 것이다. 덜 뽑힌 이 털이라는 게, 이게 말이야, 영 아니올시다, 다. 튼튼하고 철사 같은 털이 입 안에서 씹힐 때 잇몸에 닿다 못해 이와 잇몸 사이에 어떤 털은 박히기도 한다. 그 느낌. 그 이물감. 그 기분은 온갖 안 좋은 생각을 왕창 떠올리게 한다.
빳빳한 털들이 제대로 씹히지 않은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서 위장으로 내려가는 기분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알 수가 없다. 마치 머리카락을 계속 씹어 먹는 기분이다. 국밥에 머리카락 하나만 나와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국밥은 더 이상 먹기가 싫어지는데 숟가락으로 떠서 입 안에서 계속 씹어 먹는데 머리카락까지 같이 먹는 기분이다.
그러다 보면 돼지껍데기에 붙은 털만 봐도 이미 그 맛과 물성이 느껴져서 표정으로 드러난다. 입맛이 다 달아나 버린다. 그냥 눈 감고 먹으면 그만이겠지만 그게 쉽지 않다.
삶이란 고난의 연속이다. 하지만 먹어야 한다. 엄마는 내가 좋아한다고(나는 말한 적도 없지만) 조리를 한 돼지껍데기를 한 냄비 해서 내 앞에 내놨다. 한 냄비 먹어야 한다. 다 먹어야 한다. 먹어 치워야만 한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이 역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술도 마시지 않는데 소주도 꺼냈다. 엄마는 내가 돼지껍데기에 소주 한 잔 마시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소주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털이 숭숭 덜 뽑힌 돼지껍데기는 더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이란 모든 것이 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다. 요즘 소주에 빨리 취하지도 않는다. 왜 술을 이따위로 만들었을까. 도대체 털이 박힌 돼지껍데기와 함께 마셔서 취하려면 소주를 몇 병이나 마셔야 할까. 무엇보다 소주가 맛이 없다.
나이 든 엄마는 마치 어린아이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왜 인간은 돼지껍데기까지 먹어야 하는 걸까. 돼지껍데기는 다른 부위보다 왜 저렴해서 이만큼이나 돼지껍데기를 먹었는데 두 배 넘는 돼지껍데기가 아직 냉장고에 들어 있다. 인간의 삶이란 고난의 연속이다. 허들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허들이 바로 앞에 버티고 있다. 그러나 넘어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돼지껍데기로 알 수 있는 인간의 삶이다.
You Left Me Behind https://youtu.be/w0Sqi6PY680?si=4z9afev1uXSGxPe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