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2.
‘주체와 주체아 사이에서 사람들은 자기 모습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게 돼요. 이곳은 신성한 곳이에요. 호러블 한 감정은 이곳으로 들어오는 순간 밖으로 밀려가게 되어 있어요. 마음과 몸이 상대방을 향해 칼날만 겨누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곳은 보이지 않아요. 설령 보인다고 해도 문을 열고 올 수가 없어요. 이곳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어요.'
“안으로 그냥 밀리던데….”
‘당신이기에 그렇게 열린 거예요. 지금 이곳에는 당신의 순수한 마음만 있어요. 하지만 전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당신은 아파하고 있군요’
그녀는 손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곧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내 손으로 내 뺨 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곳에 들어와서 몸은 따뜻해졌지만, 여전히 차가웠던 손은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내 손바닥과 손등 손가락 마디마디에 축적되어있던 냉기가 비명을 지르며 없었다. 창을 등지고 역광으로 빛이 비치니 그녀의 얼굴은 쉬이 또렷해지지 않았다. 빛이 그녀의 머리에 닿았고 등에도 닿아서 얼굴은 더 어둡게 만들었다. 그녀의 입은 여전히 꼭 다문 채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많은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군요. 당신 마음의 여러 부분이 안타까움을 많이 짊어지고 있어요’
그녀는 어려운 의사소통으로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내가 무엇을 안타까워한다는 것이죠?”라고 이어폰으로 들리는 것 같은 내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내 뺨 위의, 그녀의 손을 잡은 내 손 위에 그녀의 나머지 한 손을 얹었다.
‘이것저것 모든 것’ 그녀가 입을 다문 채 말을 했다.
나는 누워 있다가 일어나 앉았다. 여자의 얼굴을 가까이서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반듯한 이마와 속눈썹이 없는, 가는 눈매, 작지만 도톰한 입술, 하트 모양의 콧구멍, 높지 않은 콧대. 그녀의 얼굴이었다. 앞에 있는 여자는 그녀의 얼굴과 닮았다. 머리는 그녀보다 길어서 묶었고 옷의 스타일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 얼굴은 분명 그녀의 얼굴과 닮았다. 같다고 해도 될 만큼 닮아있었다. 자매나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아가씬 누구시죠? 그리고 여긴 어디입니까?”
여전히 내 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작고 따뜻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 말에 대꾸는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데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그저 침착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미소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억 원짜리 미소였다. 세상에는 그런 미소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눈으로 확인했다.
그 미소는 내가 자주 보던, 익숙한 얼굴의 미소였다. 나는 여자의 미소에 빠져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여자 역시 나의 얼굴을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눈동자 속에 약간 놀란 듯 보이는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여자의 볼에 손을 대었다. 볼을 통해서 전해지는 소녀적인 욕구와 따스함과 온기는 죽지 않은 완연한 여성이 지닌 잉태의 따뜻함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