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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y 19. 2020

오늘의 바다

바닷가 에세이

출근하기 전에 매일 바다를 지나쳐야 하기 때문에 매일 바다를 보고 매일 그 앞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이 날은 5월 7일로 사람들의 옷차림만 아니라면 마치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든 아주 따뜻하고 바람이 많은 맑은 날과 흡사했다. 이런 날 오전의 바닷가에 앉아서 바다와 그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하늘을 보고 있으면 기시감이 든다.


몇 해전 치열했던 날 속에 한가로웠던 11월의 어느 날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눈을 감으면 그 느낌이 사라지기 때문에 깨끗해진 성층권과 바람에 움직이는 바다를 지속적으로 바라본다. 기시감은 상당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데 구체적이다. 모든 기억은 기시감에 따라 구체적으로 떠오른다.





5월 12일의 바다로 젖은 수건 같은 날이다. 늦은 밤부터 내린 비가 옅게 추적추적 계속 내리고 있는 아침이다. 바닷가에 비가 오면 모든 풍경이 달라 보인다. 등을 구부린 채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어딘가 쓸쓸하게 보여서 마치 성냥개비 사람들을 그려놓은 로렌스 스티븐 라우리의 그림처럼 보인다. 라우리의 그림 속 특징은 사람들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다. 피터팬도 그림자를 잃어버려서 혼이 나서 웬디가 꿰매 주기도 한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도 그림자와 떨어진 주인공이 지내는 마을이 나온다. 사람이 그림자를 잃어버리고 나면 공허한 사람이 되어 간다. 라우리는 ‘고독하지 않았다면 그릴 수 없었을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5월 13일의 바다의 모습은 여름의 바다다. 대기층에 먼지가 끼지 않은 깨끗한 하늘과 그에 상응하는 바다의 모습이다. 물결도 없고 그저 평온하고 평온하고 계속 평온하기만 하다. 그림 같은 모습이라서 그런지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지겹지 않은 오전의 바다다.


카페에 에어컨이 나오기 시작했다. 뜨겁고 시원한 여름의 바다가 가장 이상적인 바닷가의 모습이다. 여름의 해변은 늘 그러하지만 어떤 해에는 그저 흐리고 구름이 가득한 날과 비가 잔뜩 오는 장마의 레인 시즌이 해변의 피날레 같은 날들을 채우고는 여름의 끝물로 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 뜨겁지 않았던 여름에 잔뜩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들으면 역시 기시감이 밀려온다.



바닷가의 빽다방은 오전에도 비교적 사람들이 많다. 대체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사진에는 사람들이 별로 많아 보이지 않지만 밖에도, 실내의 사진 뒤에도 사람들이 많다. 이른 시간, 오전 9시 정도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 시간을 조금 넘겨서 오게 되면 사람들이 많다. 주말에는 더더욱 그렇다.


밀려오는 주문에도 교육을 잘 받았는지 아니면 천성인지 아르바이트하는 여성들이 모두 친절하다. 여기 카페는 장소가 협소하기에 사람들이 조금만 모여도 북적이는 것처럼 보인다. 평일에는 혼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그 여성은 몇 년째 하고 있어서 인지 사람들이 아무리 모여들어도 그걸 혼자서 금방금방 다 쳐낸다. 수거도 하고, 투고하기 쉽게 포장을 원하면 또 재빠르게 해 준다.


바쁘다는 건 이런 모습일 것이다. 가끔 지인의 건축사 사무소에 가는데 바쁜 거 안 보여?라고 말하는데, 회사를 전혀 다녀 본 적이 없는 나의 눈에는 그게 바쁜 건지 어떤 건지 알 수가 없다. 모두가 묵묵하게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을 뿐 바빠서 분주한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나는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음악도 전혀 없어서 이런 곳에서 몇 시간씩 일을 하라고 한다면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것이다.


내가 바쁘다고 생각하는 건 음식점에 주문이 밀려 들어와 주방에서는 소리를 내며 이것저것 휙휙 요리를 하고 이거 몇 번 테이블, 같은 소리가 들리고, 야채가게에서 손님들에게 이 채소, 저 야채 골라주고 돈을 주머니에 넣는 모습이 바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밀려들어 왜 내 음료는 아직 안 나오냐고 소리를 지르면(이런 사람은 대부분 관광객이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나기 마련이지만 차분하게 지금 나오고 있다고 하면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면 천하대장군 같은 모습의 아저씨도, 음 그렇게 하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얌전하게 기다린다.  


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60대 한 아주머니는 카페를 들락날락하며 마치 볼일이 급한데 어쩌지 못해 하는 것처럼 아주 난처한 얼굴로 열심히 음료를 만드는 아르바이트 여성을 몇 번이나 불러서 자신의 자동차 키를 보지 못했냐고 묻는다. 이 모습에 정말 웃음이 나온다. 아니 그걸 왜?


하지만 계산하고 음료를 만드는 아르바이트 여성들은 알 수 없다. 아주머니는 자동차의 키를 본인이 잃어버렸거나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렸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지 몇 번이나 아가씨, 혹시 차 키 못 봤죠?를 말한다. 자동차 키가 저 너머 안의 주방으로 들어갈 리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5월 17일의 바닷가는 며칠 동안 여름 같았던 얼굴을 뒤로한 채 구름도 없는 한껏 흐린 얼굴을 했다. 마치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화가가 그려 놓은 그림처럼 흐리기만 했다. 그럼에도 주일이라 가족끼리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한다. 코로나 때문에 다닥다닥 붙어 있지는 않고 거리를 두고 있다.


바닷가에 나오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어린이들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어른들일지도 모른다. 바닷가에 나와서 딱히 하는 일도 없다. 그저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바다를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제시간에 퇴근하는 것만큼 바다에서 멍 하게 바다 보기를 좋아한다. 바닷가에 나오면 평소에 할 수 없었던 행동을 해도 묵인이 되고 용서가 된다.


요컨대 몸매의 굴곡을 떠나 웃통을 벗고 다녀도 누구 하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바로 앞의 도로에서 맨발로 걸어 다녀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5월 18일의 바닷가에는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건물이 빼곡한 도시에서 느닷없이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뛰어간다. 그에 반해 기묘하게도 바닷가에 나온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대체로 걷는다. 비가 오니까 비를 맞는다, 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건 젊은 사람들이나 늙은 사람들이나 할 거 없이 누구나 그렇다. 좀 어때? 하는 기운이 가득하다.


여기 바닷가가 있는 도시도 광역시라 인구가 100만이 넘었기에 그렇게 작은 도시가 아니다. 어찌 보면 대도시인데도 바닷가에 있으면 바닷가만의 분위기가 분명하게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웅크리고 있는 분위기를 손으로 주워 담아 나름대로 사용을 한다.


좀 늦게 나오면 어때.

먼저 하세요 그럼.

천천히 가면 어때.

조금만 더 있다 가자.


이런 분위기를 사용한다. 평범한 일상인데 그 속을 벌리면 평범하지 않은 일상이다.




아이폰 3으로 담은 사진은 드라마틱하게 보인다. 저 멀리 실루엣은 뭉그러지지만 가까이 있는 빛은 그러데이션이 뭉개지지 않으며 부드럽게 찍히는 것 같다. 정학하게는 아이폰3GS지만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바로 꺼내서 사진을 담을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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