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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n 17.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124

6장 2일째 저녁

124.


 [2일째 저녁]

 한 손은 귀를 막고 한 손은 이마에 대고 비를 피하며 집으로 뛰어가다가 퇴근 후 가끔 들리는 카페에 들어갔다. 비가 폭력적으로 내렸기 때문이다. 비가 떨어지는 속도가 대단했고 양도 어마어마했다. 소나기처럼 금방 끝나지 않는 비다. 30분은 족히 더 내릴 것이다. 카페에 조금만 늦게 들어왔으면 카페의 의자에 앉지도 못할 만큼 옷이 다 젖었을 것이다. 뉴욕에 쏟아지던 폭우가 이곳으로 옮겨온 모양이었다.


 마동이 들어온 카페는 평소에 점심을 조금만 먹었거나, 외근이 있는 경우나, 퇴근 후 회사 근처에서 조깅을 하기 전이나 조깅을 한 후에 들러서 커피를 마시는 카페였다. 로컬카페인데 다른 로컬카페에 비해서 테이블이 많았다. 이곳에서 가격이 비싼 코피루왁을 한 번 마시기도 했다. 한잔에 오만 원이 넘었다. 그 가격이 적당한 가격인지 아니면 합당하지 않은지 알지 못했다. 코피루왁의 맛을 마동은 사실 알지 못한다. 마동은 그저 한 번 마셔보고 싶어서 마셔봤을 뿐이다. 그렇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세상에는 같은 이름의 물품이지만 여러 가격이 존재한다. 바리스타의 설명을 들어가며 마시니 마동 자신도 모르게 더 맛을 음미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일반 커피와 맛이 다르다고 해도, 월등히 좋다고 해도 코피루왁은 마시지 않기로 했다. 맛도 모를뿐더러 저 먼 곳에서 코피루왁을 채취하여 그 희소성으로 전 세계에 배분이 되어야 하지만 이제 사람들이 사향고양이를 ‘사육’에 의해서 억지로 코피루왁을 만든다는 소식이 언젠가부터 뉴스를 타기 시작했다. 고양이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똥의 코피루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다. 가두고 고통스럽고 무차별적인 사육으로 코피루왁을 채집하고 있다.


 차별에 대한 글을 보며 차별의 진실을 그동안 봐왔다. 차별은 어디에나 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차별이 늘 따라다니게 된다. 차별은 균등을 깨트리며 조화에 금을 낸다. 차별이 부조리한 말이면 그 반대는 괜찮은 말일까. 차별의 반대는 차이이지만 실은 무차별로 각인된다. 차별이나 무차별이나 모두가 미저러블 하다. 코피루왁은 무차별적인 사육으로 얻어지고 다른 커피와 차별화되어서 판매가 되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이 올바르지 않은 앙띠노미가 세상에는 가득했다. 무차별적인 차별 속에 개입하게 되면 허망할 만큼 못쓰게 되거나 사라지거나 죽음을 당하고 만다. ‘차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말은 애당초 지구 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말이다.


 인간의 기호는 해서는 안될 짓을 만연하게 만들었다. 푸아그라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이면에는 목이 졸려가며 괴로운 거위들의 비명횡사가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은 사향고양이들은 3년 정도밖에 살지 못했다. 세상에 태어나 보통의 수명보다 짧게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일이 버젓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고 모두가 방관하고 있다.


 굳이 고양이 똥으로 나오는 커피까지 마셔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조화일까.


 여기 카페가 채취가 아닌 사육한 고양이 똥으로 만든 코피루왁을 판매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 때문인지 카페 안은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여름옷이 비에 젖으니 살갗에 쓸리는 느낌이 조금 불쾌했다. 카페에 나열되어 있는 소파의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무늬가 뱀처럼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내리는 비가 차단된 카페 안의 조명에서 떨어지는 빛이 소파에 닿는 순간 소파의 구불구불한 곡선의 문형이 소용돌이처럼 보였고 마동은 어느새 그 모습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무늬의 움직임은 사람들의 움직임과는 달랐다. 어딘가 낯익은 움직이었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지만 움직임은 그곳에 머물러있었다. 늘 그곳에 머무르면서 마동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소파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일반론에서 벗어나면 받아들이는 것이 힘겹다. 소파는 분명히 그 자리에 늘 있지만 마동을 기다리는 것은 소파가 지니는 어떠한 개성일지도 모른다. 개성이라는 것이 소파가 본래 지니고 만들어진 본질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소파에 앉으면서 떨어뜨린 잔재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잔재는 멈추지 않고 성장을 하고 옆으로 옮겨가서 또 다른 생성을 이루었다. 카페 안의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모든 소파와 의자는 마동을 암시했다. 암시 속에는 마동의 자질을 가늠하는 눈빛이 날카롭게 드러났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의 시간 속에 숨어서 조직을 만들어내며 꾸준하게 마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름도 없는 소파의 무늬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빨라지더니 목이 없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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