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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n 20.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127

6장 2일째 저녁

127.

 시간의 흐름을 제어하고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의식을 지닌 개개인의 자질이 말살되어 가는 현실이다. 빅브라더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고 감시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학비를 반드시 내야 하는 대학생들은 처절하게 생활에 매달리지만 현재성이라고 불리는 두꺼운 삶은 그들을 조금씩 벼랑 끝으로 어깨동무를 해서 몰고 갔다. 벼랑 끝에 다가가서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삶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모른다.


 조직은 개인의 이익을 생각지 않는다. 전체의 명분을 중요하게 여길뿐이다. 패배하지 않기 위해 초조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방학이 되면 회사원들이 출근하여 점심 먹는 시간에 일어나서 컴퓨터를 하다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 위해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서는 학생들도 많았다. 아마도 이 카페에 앉아있는 대학생들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도 후자에 속 할 것이다. 자신의 삶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각자의 몫이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피카소처럼 되지는 못한다. 피카소의 재능이 이어지는 게 가능했던 것은 그의 옆에서 불만 없이 그의 수발을 들어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묵묵히 하찮은 잡일을 도맡아 하고 피카소의 손발이 되어 대화도 없이 같이 앉아서 밥을 먹어야 했던 어떤 이의 마음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조화이고 균형이라면 그런 것이다. 영화가 성공하려면 배우 뒤에서 영화를 만드는 이름 모를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처럼.


 이 세상을 인간의 마음과 같다고 인식하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과 이 세상을 물질로 보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섞여 있었고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아니었다. 세상에는 적당한 종류의 인간과 다양한 성격이 존재한다. 개개인마다 성격은 미묘하지만 다 다를지도 몰랐다. 아니 다 다르다. 비슷한 성격은 존재할지 모르나 같은 성격이란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래야 균형이 잡히니까.


 그르르륵 하며 테이블에 진동이 울렸다. 평소 카페 안을 꽉 채울 만큼 사람들이 없어서 여직원이 커피를 가져다주는데 오늘은 달랐다. 마동은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받아왔다. 몸은 거짓말처럼, 어젯밤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머리가 아픈 것도 속이 울렁거리는 증상도 전혀 없었다. 심지어는 피부가 탱탱해지며 근육이 살아 움직일 만큼 컨디션이 좋았다. 이제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식어도 좋다. 마동이 자주 오는 이곳의 커피는 식어도 맛있다. 물론 마동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트위터를 하거나 창밖의 비 내리는 풍경을 보거나 카페 책장에 있는 책이나 볼 요량이었다. 카페의 책장에서는 모파상의 책들이 많았다. ‘오를라'는 꽤 여러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섬뜩했다. 그것과는 다르게 ‘목걸이’ 같은 단편은 아주 사실주의적이다.


 조퇴를 하고 나오니 빈 시간을 얻었다. 사람들이 왜 조퇴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복권 같은 그 시간에 마동은 멍청하게 있거나 책이나 보고 싶었다. 마동에게 있어 자주 가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하루 중에 가장 깊고 넓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소피도 만나고 미지와의 조우도 했고 여러 가지 공상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달릴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는 곳이 여기 카페다. 커피 향을 맡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이틀 동안 기이해진 몸의 자극이 가라앉았다. 테이블에 커피와 치즈케이크를 들고 와서 앉았을 때 마동은 소변이 마려웠다. 전조도 없었다. 소나기처럼 느닷없이 소변이 나오려 했다. 오늘 아침 첫 소변은 아주 조금 나왔다. 마동은 급하게 일어나서 화장실로 빠르게 갔다.


 소변은 방광을 통해서 압도적으로 밖으로 나오려 했다. 소변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오면 마동은 자신만의 시간에 더욱 깊게 빠져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마동은 테이블에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올려 둔 채로 화장실로 가서 소변을 봤다. 화장실은 새로 산 거울처럼 깨끗했지만 개성은 결여되어 있었다. 개성이 좀 더 가미되었다면 사람들이 더 좋아했을 텐데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방뇨의 기쁨은 방출에서 오는 쾌활함에 있다. 어린 시절부터 생리적 쾌감에 자연스럽게 적응을 한다. 소변을 본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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