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을 짓는 건 정말 힘든 일인 것 같다. 긴 소설을 쓴다면 주인공의 이름을 남자는 ‘나옥고’이고, 여자 주인공 이름은 ‘하룩희’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룩희는 하루키에서 딴 것이고 나옥고는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에서 땄다.
옥고는 119 구조대원으로 손바닥을 대면 상대방의 일 년 뒤가 보인다. 미술학원 선생님 룩희는 옥고의 누나로 친누나가 아니다. 어린 시절 옥고가 하나뿐인 아버지를 잃고 매일 힘들어할 때 룩희가 옥고를 위로해준다. 옥고는 룩희의 그림 모델이 언제나 되어 준다. 두 사람은 잘 자라서 룩희는 27살, 옥고는 25살이 되었다. 구조대원으로 지내던 중 옥고는 늘 자신을 위로해주는 룩희와 손바닥을 마주 대하고 거기서 일 년 뒤의 룩희가 죽는 모습을 본다.
너무 대 놓고 일드인 ‘4분간의 마리골드’였다. 거기에 나오는 ‘나나오’는 이전의 나나오와는 다른 분위기다. 이전에는 늘 마네킹 같은 모습의 배역이나 인형 같은 연기를 했는데 마리골드에서는 얼굴도 성숙해져 버린 것 같고, 수수한 데다, 연기도 자연스러워졌다. 늘 화가 나 있고 성을 내고 꼬나보고 독이 올라 있는 것 같았는데 마리골드에서는 아주 청순하게 나온다. 그게 어쩐지 너무 자연스러웠다. 나나오가 원래 그런 여자였잖아,라고 하는 것처럼 몹시 잘 어울렸다.
하루키 하니까 마지막에 나온 장편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주인공이 화가로 나온다. 초상화만 그리는데 모델을 세워두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간 뒤 그 모습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가 초상화로 그린다. 그리고 스냅사진 3장 정도를 받아 두는 정도다. 사실 초상화를 그렇게 입력된 정보만으로 그린다는 건 몹시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4분간의 마리골드에서도 나나오는 버스에서 한 번 봤던 학생을 기억해서 그림을 그린다.
천재적으로 인터뷰를 한 트루먼 카포티를 하루키는 왕왕 언급했다. 하루키는 카포티의 인터뷰 스타일을 칭찬했다. 카포티는 소설가로도 유명하지만(티파니에서 아침을) 실은 기자, 인터뷰어로써 더 유명하다.
카포티는 인터뷰를 할 때 녹음이라든가 받아 적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상대방의 눈을 보며 위로하듯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그 양이 실로 방대하더라도 카포티는 절대 당황하지 않는다. 인터뷰가 끝나면 기적처럼 머릿속에 있는 것을 실타래를 풀듯 하나씩 꺼내서 기사를 작성한다. 카포티의 기사는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카포티의 장편 ‘인 콜드 블러드’와 단편 소설집 ‘차가운 벽’과 또 다른 한 권(제목이 생각 않남)을 읽었는데 ‘인 콜드 블러드’는 다큐와 신문기사 사회면을 좋아한다면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실제 이야기를 죽 나열하듯 적어 놓아서 사건 현장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단편은 10대 때 쓴 소설이라는데 읽기가 버거웠다.
언더그라운드를 펴낼 때 하루키는 100명에 달하는 사람을 인터뷰를 했다. 아마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기사단장에서는 주인공은 카포티처럼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니까.
별개의 이야기로 김훈의 '남한산성'이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은 마치 김훈이 그 시대, 그 전쟁 통, 그 자리에 서서 그 광경을 눈으로 목격하고 그것을 거짓 없이 그저 죽 열거해 놓은 것처럼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