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3일째
165.
그녀는 언제나 마동에게 소설처럼 '당신'이라는 호칭을 붙여서 말했다. 얼핏 들으면 기분이 나쁠 만 도한데 그녀가 부르는 호칭의 ‘론’에는 비바람이 걷힌 잔잔함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넘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건 어떤 면에서 보면 그녀에게 손해일 지도 모르는 일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그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마동의 편견이지만 마동이 보는 박는개는 그러했다.
박는개는 26살로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했다. 법학을 전공하고 이 회사에 들어와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상위 1퍼센트에 속할 만큼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다. 오너도 그녀를 입사시키고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오너는 마동에게 얼음공주 같은 박는개에게 회사생활의 고충 같은 것을 물어보라고 넌지시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는개는 회사에서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옷차림을 고수했다. 딱히 몇 살 정도로 옷을 입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본인의 나이보다 원숙하게 스타일을 연출했다. 고작해야 3, 4살 위의 나이처럼 옷을 입고 출근했지만 꿈의 리모델링 의뢰가 들어온 외국 고객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녀의 원숙미는 고조되었다. 품격이 살아났다. 외국인들은 예쁘기만 한 그녀를 처음 봤을 때와 미팅이 끝났을 때는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박는개는 그런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금융업계 한 부서의 여성 팀장 같은 분위기도 지니고 있어서 남자들로 하여금 쉽게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그녀가 입고 출근하는 정장의 스타일에서 그런 기운이 흘렀다. 그녀의 에너지는 꾸준한 무엇인가를 통해 배어 있었다. 향수처럼 은은하게 조금씩 빠져나오는 것이다. 외모는 깔끔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포니테일로 묶고 일을 했다. 아직 그녀가 머리를 푼 모습을 회사 내에서 본 사람은 없다. 그녀는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몸매를 감출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녀 역시 업무가 끝나고 퇴근을 하면 어딘가에 들어가서 매일매일 관리를 꾸준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회사에서는 마동에게도, 는개에게도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고 매일매일 하는 체력관리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감기나 걸리거나 절대 아프지 않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 중에 마동이 먼저 무너진 것이다.
자신을 철저하게 내 몰면서 관리를 하는 것은 오래전에 살다가 먼지가 되어 버린 대작가들 역시 그렇게 생활을 했다. 괴테도 나이가 들어서는 젊었을 때처럼 하루 종일 집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규칙적으로 글을 썼다. 그렇게 정신과 육체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발튀스 역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늘 하던 패턴으로 우편물을 읽고 아침을 먹고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그런 패턴으로 80살이 될 때까지 그림에 몰두했다. 그것이 사람의 균형이라고 생각했다. 불행한 카프카 역시 늘 비슷한 시간에 글을 꾸준히 썼다. 몇 번의 파혼과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점점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본인이 파괴되지 않는 방법은 오로지 글을 쓰는 행위이며, 그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단지 좁은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해야 하는 가족들 때문에 다른 작가들에 비해 밤부터 새벽까지 글을 쓴 카프카를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박는개도 절제를 통해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 감기가 전염병처럼 돌았을 때 박는개와 고마동 두 사람만 감기가 피해 갔다. 둘 다 일하는 부분에서 지치는 모습도 없었다. 조퇴를 하거나 결근을 한 적도 물론 없었다. 박는개가 입고 있는 치마는 무릎 위까지 오는 타이트한 치마였다. 그렇지만 그 치마를 입었음에도 치마는 그녀가 활동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면이 있었지만 표정을 알 수 없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걸음을 걸을 때에도 부자연스러운 동작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리가 벌어지지도 않았고 뒤에서 봤을 때에도 걷는 모습이 올곧았다. 걸음걸이가 아름답기까지 했다. 걸음걸이를 보면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고 느낄 정도였다. 예쁜 사물이나 모습은 질리기 마련이지만 아름다운 것은 질리지 않는다. 걸음이 아름답다고 느껴지게 만든 몇 안 되는 여성일 것이다. 여자는 참 대단한 존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