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손을 뻗는 곳에 음악이 없으면 불안하던 시절이 있었다. 음악이 자산이라 여기던 시절이었고 그것을 허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든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라는 생각이 강했다. 제대 후 복학하기 전 8개월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토건회사에서 4개월인가, 일을 했다. 후배의 친형이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잠깐 아르바이트로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토건회사에서 일하는 건 꽤 재미가 있었다. 현장에서 3개월 일을 했는데 재미있으니까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일을 하라고, 일종의 진급이 되었는데 사무실에서 한 달 더 다니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나는 아마 그 토건회사가 맞았다면 그대로 눌러앉아 복학이고 뭐고 그냥 그대로 회사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은 아마도 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신 회식과 스트레스로 뚱뚱해진 몸으로 땀을 닦으며 입찰 같은 것을 보러 전국을 다닐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회사생활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토건회사에서 일을 하기 전 군대에서 내무반 완고(참)가 되었을 때 내가 60%의 돈을 내고 나머지 짝대기 4개들이 40%의 돈을 거둬서 내무반에 중고 오디오 스테레오를 넣었다. 음악을 빵빵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몇 개월 남짓 되는 완고 생활을 하는 기간에는 음악을 실컷 듣다가 제대를 했다. 7월에 제대했기에 저녁 점오가 끝이 나면 내무반 아이들을 전부 목욕을 시킨 다음 선풍기 밑에서 모두 누워 쮸쮸바를 빨며 모두가 음악을 들었다.
머라이어 캐리를 듣고 브라이언 아담스를 듣고 마이클 잭슨을 들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내무반에 크게 틀어 놓고 싶은 노래는 바쏘리나 메가데쓰처럼 강한 음악이었지만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군생활이라는 게 모두가 힘들다. 점오가 끝나기 전과 후에는 일반병들은 늘 바쁘다. 야간근무자를 제외하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내가 제일 고참일 때는 점오 후에 휴가자의 군화를 반질하게 광을 낸다거나 하는 등의 쓸데없는 일은 하지 않도록 했다. 전혀 필요 없는 일이다. 그저 노동을 위한 일일 뿐이다. 그런 일들이 군대에는 잔뜩 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는 명분 하에 묵시되는 쓸데없고, 쓸모없는 관습이 가득하다. 그런 것들을 군생활을 하면서 낱낱이 봐 두었다가 내가 최고참일 때 전부 없애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내무반 모든 아이들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것이다. 편지를 쓰고 싶으면 쓰고,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읽는다. 한 내무반에 보통 열 명이 넘기 때문에 점오 후에 마시는 커피는 짝대기 4개들이 돈을 내서 전부 산다. 커피라고 하는 게 별 다를 건 없는 자판기 커피를 말한다. 그런데 아이스커피는 그 안에 얼음이 두르르르르 하고 떨어져 열 몇 잔을 들고 오는 사이에는 좀 시원한 커피가 된다. 그게 아주 맛있다. 군대에서는 우습지만 아이스커피를 마실수 있는 서열도 짝대기 두 개를 달아야 마실 수 있었다.
보통 점오가 끝나면 분위기가 아주 무섭다. 점오 시간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작살나는 시간이다. 어떻든 그런 것들을 내가 있는 내무반에서는 싹 없앴다. 그것이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후임들이 또 그런 '자유함'을 싫어해서 관습을 따라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밑의 후임이나 후임의 후임들은 대체로 꽤나 순둥순둥 하고 내무반의 '자유함'을 좋아했었다.
그렇게 내무반에는 티브이보다는 음악이 늘 흘렀고 여름에 시원하게 보내다가 나는 제대를 했다. 그리고 토건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현장일은 우오수 분리를 하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70년대 그 이전에 지어진 집들의 우수(빗물)와 오수(하수구)가 한 곳으로 흘러 도시 중심을 관통하는 강으로 흐른다. 관급공사로 각 구마다 선택된 토건회사들이 구역을 배정받아서 오래된 집들의 우수와 오수를 분리하는 작업을 한다. 빗물은 강으로 하수구의 물은 정화 처리장으로 흐르게 분리를 한다. 내가 맡은 일은 공사가 들어가기 전에 구역을 돌며 집집마다 공사를 알리고 전단지를 돌린다, 구청 치수계에서 나온 설계도면대로 공사가 진행되는지 체크를 하면 되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뚫을 것이며 그 안에 파이프는 몇 개, 재료는 뭐가 들어가는지 설계대로 사용하는지 체크를 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내가 현장에서 하루 종일 계속할 일은 없었다. 하청을 받아서 노동을 하는 분들의 간식을 챙겨주고(주로 빵과 막걸리) 설계도면에 현장에 들어간 작업을 보며 체크를 해서 회사에 건네고 나는 퇴근을 하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근처의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좀 읽기도 하고 한 곳에서 보통 4일 정도는 머무르니 동네 사람들과 좀 친해져서 이야기도 하면서 보냈다. 그러다가 어쩐 일인지 설계도면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공사가 먼저 들어간 적이 있었다. 현장 대장(오야붕이라고 하죠)은 나이가 60줄로 이런 방면에는 배테랑이라 설계도면 없이도 거침없이 바로 공사를 했다. 그때부터 나는 공사 현장을 보며 설계도면을 그려서 사무실에 보냈다.
그 뒤로 '선공사 후 설계'가 이루어졌다. 완전 엉망진창인 것이다. 구청에서 감독관이 나오는 날이면 현장을 방문해서 5분 정도 있다가 바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그리고 사우나를 간다. 물론 회사에서 그렇게 접대를 한다. 그렇게 6개 업체를 감독관은 돈다. 한 번은 점심을 먹는데 대리가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밥도 정말 천천히 오래 먹더라. 그 뒤로는 현장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과(대부분 나이가 엄청 많은) 어울렸다. 일이 끝나면 고기도 구워 먹고 하면서. 그들은 모두 수더분하고 친절했다. 물론 언어에는 거침없었지만 상반된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가운데 그들의 보편성이라는 것이 이루어졌다. 냉엄한 현실 속에서 위트를 쏟아낼 수 있는 언어는 그들의 스타일인 것이다.
"야, 박 군아, 이거 먹어"라며 내 밥그릇에 고등어 살점을 턱 얹어준다.
"어이, 박 군아, 오늘은 막걸리 4병 사 오고, 나는 크림빵으로."
"박 군아, 포클레인 함 몰아볼래." "박 군아, 고기 많이 먹으레이"라며 아버지처럼 대해준다. 물론 글로는 언어를 조금 순화했지만 저 사이사이에 들어간 그들의 언어가 위트를 말한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위트가 빠진다면 세계는 영혼적인 아포칼립스가 될 것이다.
공사현장을 보고 설계도면을 그린 것이 꽤나 칭찬을 받은 모양이었다. 회사에서는 사무실에서 제대로 일을 해보라고 해서 사무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는 분주하고 힘들고 바쁘고 재미있어서 몰랐지만 사무실에서는 모두가 삭막한 얼굴에 삭막한 분위기로 앉아서 일만 했다. 여직원(누나)도 있었지만 삭막함에 종속되어 있어서 모르는 것을 물어도 시큰둥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무실의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음악이 전혀 없었다. 현장에서 음악을 들으며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는 것과는 달라도 아주 달랐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 삭막함이 토건회사의 실적으로 이어지는 키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음악을 들어도 됩니까,라고 했더니 부장이 그래, 들어,라고 하기에 라디오를 들고 가서 하루 종일 틀었더니 퇴근 전에 대리에게 불려 가서 한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사무실에서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일을 그만두고 나왔다. 내 인생 최초의 회사생활이었다. 그 후로 아직까지 회사는 다녀본 적이 없다.
바쁜 거 안 보여?라고 하지만 아직 그런 부분에 미성숙한 나에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이 바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바쁨'은 점심시간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전골집 사장님과 직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음식을 나르고 닦고 계산을 하고 인사를 하는 모습이다. 또는 이른 아침에 두부를 사려고 두부집에 모여든 손님들에게 정성스럽게 손두부를 담아서 건네고 돈을 받아서 띠링하며 금고가 열리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바쁨'이다.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일하는 곳은 없을까.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한다는 건 분명 행복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내 좁은 활동반경 내에 손을 뻗으면 음악이 있어야 했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배부르다는 시절이었다. 밥을 먹지 않으면 몸이 말라가지만 음악을 듣지 않으면 마음이 메말라 죽는 건 매한가지라 여기던 어렸던 시절.
이제 음악만으로 좋은 시절은 분명 아니다. 오히여 음악이 소리가 아니라 소음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음악이 없으면 안 되는 또 다른 시절이기도 하다. 시에 음을 갖다 붙은 게 노래라서 그런지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으면 길 잃은 멜로디 때문에 가끔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나는 하나의 소실점이 되어서 점점 소거되는 기분이 든다. 나의 음악은 시절에 머물러 있다. 철 지난 음악을 촌스러운 음장 기기로 듣고 있으면 그때를 소환한다. 5년 전 지금은 어떤 음악을 들었을까. 10년 전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