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분비물, 침, 재채기, 타액.
현재 가장 두려워하는 단어가 아닌가 하다.
2015년 6월, 때 아닌 메르스로 일상의 혼란을 느끼며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해졌다. 메르스는 이번에 한국으로 들어와서 그 힘을 키웠는데 바이러스 형태로 힘을 키운 것이 아니라 메르스가 전하는 어떤 관념이 사람들의 혼란을 더 야기했고 공황상태로 밀어 넣고 말았다.
영화 컨테이젼을 보는 착각이 들 정도다. 메르스를 다루는 언론은 초기대응이 미흡해서 구멍 뚫린 정부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받지 못해 추측성 보도를 전달함으로 사람들의 혼돈을 증폭시켰다. 일 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부는 병원을, 병원은 정부를 향해 독 번데기를 뱉어냈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지 못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조직이 아닌 개개인이 되었다. 그에 따라 많은 곳에서 기능을 잃어버린 개개인의 고통이 생겨났고 전국으로 퍼져나간 메르스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바이러스는 왜 생기는가.
숙주를 찾아서 기생을 하는데 숙주가 죽기를 바라며 숙주가 죽으면 바이러스 역시 생명을 잃고 만다. 그럼에도 바이러스는 어딘가에서 인간의 몸으로 들어온다. 이 바이러스가 인간의 몸에 기생을 하면서 숙주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기생수처럼 자신이 살기 위해, 생명의 연장을 위해 어떤 몸부림이나 방어를 한다면 지금 보다 공포가 덜했을까.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인간을 공격해온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보는 입장에서다.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대상을 정해놓고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숙주를 찾아서 이동경로를 따라 옮겨가며 숙주의 몸을 파고들어 죽이고는 자신도 죽는다. 바이러스는 사실 아주 연약하고 미미한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몸을 파고 들어온 기생수 같은 바이러스는 자신이 살기 위해 인간을 포식하는 생물체로 나온다. 그저 생존을 위해 인간을 먹는다. 그것에 집중을 할 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살육을 하기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기생하는 생물체가 괴물로 보이겠지만 기생체는 살기 위해서 인간의 고기를 먹는 것으로 나온다.
기생하는 생물의 임장에서 보면 인간이 가장 악랄하고 포악한 지구 상의 생물체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니고 있지만 단백질의 공급원이라는 이유로 많은 가축을 무차별적으로 사육을 하여 고기를 얻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물들에게서는(몇 종을 제외하고) 볼 수 없는 동족 살육도 서슴지 않고 일삼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동족 포식을 하는 동물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족을 먹는 경우가 있지만 인간은 그 이외의 이유로 같은 인간을 죽인다. 이념이 달라서, 믿고 있는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이유를 갖다 붙여서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죽인다.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나와 다르면 따돌리고 괴롭혀서 죽인다.
이런 모습이 기생하는 바이러스 입장에서 보면 모순인 것이다. 비록 기생수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요컨대 ‘렛 미 인’에서도 잘 나타난다.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은 모순의 덩어리다. 그래서 그럴까 현재 한국은 바이러스의 공포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혼란을 겪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한국 전역이 바이러스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해서 한국으로 가는 모든 여행을 막았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뉴스를 통해서 정부 산하 관계부터, 보건당국에서는 말하고 있지만 어딘가 겉돌고 있다고 국민들은 인식하고 있다. 더불어 늘어가기만 하는 메르스 확진자의 소식에 점점 불안하기만 하다.
중국에서 인천항으로 들어온 크루저 승선 6,000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은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배 안에서 밖을 바라보기만 하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두렵기만 하다. 격리 요청에 거부하고 밖으로 돌아다닌다. 나만 걸릴 수 없다, 식의 행보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많은 곳에 전문가들이 나와서 코로나바이러스는 아주 힘이 없고 여린 존재하고 말하고 있다. 체내에 들어온 코로나의 껍질은 사람이 숨을 쉬면 그 막이 깨지며 바이러스는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지금 한국에 번진 메르스는 공기감염이 된다고 할 정도로 전파가 매일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따른 구멍 뚫린 모습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노래방은 물론이고 메르스가 발병한 곳에서 치료를 받던 환자들은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더 큰 불안감으로 생활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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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간의 몸에 파고 들어온 바이러스는 무기경쟁을 하고 있다. 무기경쟁에서 인간은 소극적이고 바이러스는 적극적이 된다. 인간과 전혀 다른, 인간의 몸을 숙주로 여기고 파고 들어온 바이러스와의 공진화는 이루어지지 않을까. 언제까지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그것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까지의 글은 2015년 메르스가 왔을 때 적은 글이다. 5년이 지난 지금 바뀐 게 전혀 없다는 것이 신기하다. 2015년에 쓴 글에도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그때 쉽게 깨져 죽는다던 코로나는 이제 전 세계의 핵공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균은 여름에 창궐하고 바이러스는 겨울에 창궐한다. 그리고 대체로 이런 균이나 바이러스는 섬에서 도시로 흘러들어온다. 도시에서 섬으로 간 유일한 균이 매독균이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에는 이런 규칙이 전부 깨져버렸다. 바이러스가 전혀 생존할 수 없는 이런 무더워 속에서도 무럭무럭 세력을 확장시키는 바이러스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주말을 기점으로 다시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 공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 깊게 붙어 버린 폐병 같은 숙명이 되었다. 뉴스 채널에서는 속보라는 타이틀을 달고 ‘모임 등 사람 간 접촉 줄이고 외출 되도록 삼가야’라고 말하고 있다.
개학을 하고 학교를 가고 아이들과 함께 모여 점심을 먹고 마주 보고 앉아서 그 녀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건 이제 아주 먼 기억이 되었다. 여름의 해변에는 물놀이를 즐기고 밤마다 축제가 열리고 무대에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가수들이 까맣게 타들어간 얼굴로 여름밤을 노래하는 풍경은 볼 수 없어졌다. 맛있는 안주에 자신이 있는 주인들이 이름을 걸고 하는 술집으로 여름밤을 달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꺼져가는 여름을 한잔의 술과 함께 읊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어졌다. 흑요나 아이가 바이러스에 걸리게 되면 치료가 되고의 문제를 떠나 엄마 아빠와 떨어져 음압병실에 갇혀서 우주인 같은 복장을 입은 의료진들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야 한다. 당사자인 아이도, 그걸 보는 부모도 그리고 시작부터 끝을 알 수 없는 지금까지 고생을 하는 의료진들 역시 할 짓이 못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격리 중에 탈출을 하여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이들이 늘어났다. 마치 자신은 신이 된 것 마냥 아프지 않은데 왜 나를 격리시키냐 라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고 있는 모습에서 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공포가 느껴진다.
무지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좀비가 그렇다. 오로지 하나의 신념으로만 움직인다. 무식하면 못 배워서 그렇다 치지만 무지는 자신의 아는 것이 전부이며 옳은 것이라 믿기에 신념을 장착하면 걷잡을 수 없이 폭주를 한다. 그것이 무섭다.
정말 언제까지 바이러스에 대해서 사력을 다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몇 년 살다가 죽고 나면 그만이지만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