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숙명여대] 연화봉 푸른 언덕 청파길을 걷다

서울역 광장에 왔습니다.

이 곳은 늘 무슨 소리가 납니다.

자기 주장, 차소리, 찬송가, 부르는 소리 .....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을 위하여 모이고 흩어지는 장소입니다.

그 곳에 오늘 우리가 모였습니다.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서울 청파길을 걷다'는 프로그램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걸었고, 그 길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아내고, 삶의 의미를 끄집어낸 그 길로의 초대입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저는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매우 아쉬운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 길을 다시 걷습니다. 

이 번에는 늘 같이 걷는 김민주 회장님이나 구자룡박사님뿐만 아니라,

숙명여대생들과 이 길에 관심있는 여러 분들과 같이 갑니다.

우리가 느꼈던 길을 같이 느끼고자 하는 기회를 갖게 된 거죠.

처음으로 20여분이 모이셨습니다.


강우규열사의 동상앞에서 모였습니다.

보기에도 늠름하고 힘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를 억압하던 일제에 목숨바쳐 대결하시던 분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말입니다. 

이렇듯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을 걸음걸음마다 우리 선조들, 우리들의 숨결이 있습니다.


**************************************

강우규 (姜宇奎)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한의학을 공부하여 1884년부터는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하여 한의사로 인술을 베푸는 한편, 아이들에게는 성리학 학문을 가르쳤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세력들과 연계하여 조선의 독립을 의논했고 4년 후 랴오허 현으로 이사하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1915년 요동의 랴오허 현(饒河縣)으로 옮겨가 거주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했으며, 요하 주변의 농토를 개간하여 한인촌인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다. 1917년 지린 성 동화 현에 광동중학교를 세워 동포 교육에 전력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 뒤 광동중학교와 신흥촌을 다른 한인 교포에게 넘긴 뒤 그는 국내에 잠입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 지린 성 지부장이 되어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9월 2일, 내외 정세와 총독의 동정을 살피던 중,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것을 알고, 사이토의 내한 당일 현재의 서울역인 남대문역에서 조선 총독으로 신임된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으나, 아쉽게도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최종 판결에서 총독 암살미수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 구형,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재판받고, 교수형 당하기까지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않고 당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남대시장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서울로7017 고가도로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역 광장입니다.

저 서울역이 지어진 것은 1924년입니다. 100년에서 5년이 모자르네요.

그리고 서울역 주변은 100년전은 고사하고, 50년전의 흔적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전쟁으로 모두 부서지고 새로 지은 건물들입니다.

그런데 전 왜 저런 광장만 보면 가슴이 비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서울역이니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생깁니다. 

저 건물은 스위스의 옛날 루체른역을 모방해서 만든 거라고 합니다.


우리는 걷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같이 걷습니다.

저 길을 만든 사람과 저 길을 걸을 사람들이 같이 걷습니다.

그리고 궁금했습니다.

우리가 같은 걸 느낄 지 말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윤슬'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습니다.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이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예술 작품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커다라서 직접 들어가 체험할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2800개의 계단을 통해 이 작품 안으로 들어가 걸으면서 공간을 경험할 수있습니다.
상당히 독특한 공간을 보게 됩니다. 

국립극단에 있는 고 백성희배우의 사진입니다.

저 포스터에 쓰여져 있는 어록이 인상적입니다.


그 옆에 있는 고 장민호 배우의 사진입니다.

참 순하게 생기신 분입니다. 배역도 그런 역할을 많이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평생을 여러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일하기란 쉽지 않지요.

본인의 선택도 있지만, 하늘의 선택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국립극단에 와서 저 두분의 포스터를 보면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골목 담벼락에 붙어있는 서계동, 청파동의 관내도입니다.

저 안에는 수많은 골목이 있고, 그 안에는 수많은 일터가 있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 이 길을 걷지 않았다면, 저 지도는 그냥 그림이었을 뿐이었겠지요.

저 골목중 꽤 여러 곳을 걸어보았습니다.

그 골목안의 모습이 눈에 선한 곳도 있습니다.

내가 사는 안암동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비스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그게 신기할 때도 있고요.


자, 슬슬 골목길을 걸어볼까요?


청파동 개미슈퍼입니다.

저 담벼락에는 무수한 사람들의 사진이 붙어있습니다.

자 슈퍼의 주인장이 일부러 구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네가 왔다가 기념삼아 붙였다고 합니다.

다시 오기를 기도하면서 그렇게 했을 지도 모릅니다.

유명한 관광지의 연못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오게 해주십사 하며 기도하듯이 말입니다.


목도 마르고 아주머니도 오랜 만에 뵙고 싶어서 불러 보았습니다.

가게 밖으로 나와있는 냉동고에 가득한 아이스크림도 먹을 겸.

여름에는 밖에 있는 플라스틱 테이블과 낮은 의자에 앉아 시원하게 맥주 한 캔 들이키고 가기도 하지요.

마침, 아주머니가 안 계시네요.

개미슈퍼 아줌마~ 저희 왔다갑니다. 


언덕을 올라갑니다.

담벼락에는 그림이 그려져있습니다.

아름답게 멋을 부린 그림이라기보다는 편한 그림입니다.

한국이 많이 발전했다는 것이 이렇게 마을을 멋있게 꾸며보려는 노력이 돋보입니다.


그 계단을 올라서면 청파동, 서울역이 한 눈에 보입니다.


또 계단을 올라갑니다.

산이 많은 우리는 산을 따라 집을 지어졌습니다.

집이 많아지니 골목도 생기고요.

아파트가 많아진 지금은 골목도 많이 사라졌지만, 청파동은 아직도 골목의 동네입니다. 


우리가 찾아낸 청파동 전망대입니다.

전망대라기 보다는 언덕위 동네있는 공터입니다.

높기 때문에 청파동이 잘 보이죠.

바로 전에 보았던 낮은 곳에서 본 청파동과는 같은 곳이지만 다른 느낌입니다.

세상은 내가 어디있는 가에 따라서 달라보입니다.


또 골목입니다.


아, 김민주교수님이 골목골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냥 휙하고 지나갈 길을 설명듣고 나면 다시 보게 되지요.

왜냐하면 내가 걷는 길이 그냥 생긴 길이 아니라, 다 사연이 있는 길이거든요.


만리동의 유명한 성우이용원입니다.

세상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늘 변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우이용원이나 개미슈퍼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명해졌습니다.

이제는 일부러 건물외관도 고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러 오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않을 것은 무엇으로 구분할까요?


오늘은 정해진 일정이 있어서 이 곳 바로 앞에 있는 배문고등학교 옆의 만리시장을 지나쳤습니다.

그 곳은 옛날 영화를 찍는 스튜디오였지만, 시장으로 변한 곳입니다.

한국 영화의 초창기에 대한 사연을 품었지만, 꼭꼭 숨어있습니다.

배문고와 효창공원을 넘어가는 고개입니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언덕이 많은 도시들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고개를 넘을 때마다 갑자기 나타나는 새로운 도시 풍경도 기대합니다.

차를 타고 세상을 지나다 보면 쌕쌕하고 지나가지만,

이렇게 걸을 때는 발걸음마다 의미를 갖게 되나 봅니다.

그러다 나중에 추억거리가 많아지면 어떻게 할 것인지가 걱정될 때도 있습니다.


효창공원에 왔습니다.

이 곳에는 독립운동을 하시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기개를 많이 느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를 가보니, 그 곳에도 젊은이들이 많이 옵니다.

5천년 역사에서 불과36년입니다.

그 찰나같은 순간때문에 우리를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분들처럼 목숨걸고 싸운 분들도 많으니까요.


백범 김구 선생의 묘역입니다.

잠시 묵념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우리는 선생이 계셨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효창공원을 나와서 숙명여대 역사박물관에 왔습니다.

박물관을 안내하는 학생입니다.

자기 학교의 역사를 잘 안다는 것이 저 학생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많은 사람들이 숙명을 좋아할 때 숙대생들도 좋아하겠지요?

오늘 우리가 청파로를 걸으면서 이 곳과 연결하게 됩니다.



숙명여대가 처음에는 '명신여학교'였네요.

어렵고 힘든 시절에 여성교육을 위하여 애썼던 순헌황귀비의 기념하는 명패입니다.

학교 앞길은 순헌황귀비로 라고 명명했습니다.



청파동에 있는 숙명여대는 학교 근처의 마을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 청파길을 걷는 것은 그 방안의 일환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늘 같이 걸었던 학생, 시민들과 오늘의 소감을 들었습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안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도 학교는 그 마을의 중심이었습니다.

이제 숙명여대가 그 관계를 더 깊게 하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청파길을 걸으며 그 노력에 공감해주기를 기대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청파길 가는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