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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작가가 되면, 교육비 0원

by 카르멘

"엄마 책 나왔어. 작가야. 7월에 책 또 나온다~~~"


아침밥 먹으며 엄마가 아이에게 자랑을 한다.


"나는? 나도 할 거야!"


아이가 샘을 내며 말한다.


엄마가 작가가 되면, 아이도 작가가 된다.


내가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면 매달 121만 원이 든다.

이건 전국 영유의 평균 가격이다.

1년만 영유에 보내면 1,452만 원이 드는데 국내 4년제 대학 등록금 692만 원보다 많다.

3년(5~7세)은 다녀야지 하면 총 4,356만 원이 드는데 로스쿨 3년 학비와 맞먹는다.

물론 지역마다 다른데, 희한하게도 공무원들이 많은 세종시가 148만 원으로 전국 1위다.


갑자기 웬 영유 이야기냐고?

아이가 내년이면 유치원을 다닐 나이다. 그래서 주변 유치원들을 수소문했는데, 직장 후배가 아이 두 명을 영유에 보낸단다. 연년생 남매를 영유에 보내고 있고, 심지어 내년에는 조금 더 교육환경이 좋은(교육열이 높은) 지역으로 이사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영혼을 끌어모은 전세로..

내가 이전 브런치 글(영어유치원은, 유치원이 아닙니다)에도 썼지만, 나는 영유 반대파다.

그래서 영유는 패스.


그런데 이번엔 남편 회사 후배가 ‘놀이학교’에 아이 둘을 다 보냈는데, 강추!라고 한다.

놀이학교? 그래, 아이들을 많이 놀게 해주는 유치원인가? 싶어 검색해 봤더니.

웬걸, 놀이학교 비용이 100만 원?

알고 보니, 각 과목마다 수업이 이뤄지는 고급 학원으로 보통 영유를 보낼까 고민할 때 대안으로 고민되는 선택지였다. 역시나 비용적으로도 많이 들고, 영유아교육법의 관할지역도 아니어서 패스. 그 밖에도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유치원은 월 60만 원,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좋다는 숲유치원은 30만 원...


그러다 보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게 뭘까?

그걸 배우러 아이들이 가야 할 곳이 어딜까?

고급 유치원? 영어학원? 놀이학교? 숲유치원?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도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을 관찰하는 데서 철학을 시작했다.” (주 1)


칼 융 (Carl Gustav Jung)도 말했다.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것을 직면하지 않으면, 그것은 운명처럼 당신의 삶을 지배할 것이다.”(주 2)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이 말했다.

“우리가 찾는 것은 인생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주 3)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도 한마디 보탰다.

“나는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주 4)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도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남들의 생각으로 살아간다.”(주 5)




결국, 아이는 아이 자신이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아이는 남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한 중심을 잡기 위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자기 자신이 되는데 월 100~150만 원의 비용이 드는 게 맞는 걸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나는 확신이 없는 비용을 쓰고 싶진 않을 뿐이다.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는 채 요새 다들 그렇게 한다니까 얼떨결에 등 떠밀려 돈을 쓰고 싶진 않다.

그리고, 분명한 건 나도 모르면서 아이를 길 위에 세우고 방향을 강요하고 싶진 않다는 점이다.


반면 내 개인책의 값은 17,000원이다.

그리고 앞으로 공동저자로 나올 책의 가격은 23,000원이 될 것 같다.

내가 아이를 키우며 배운 값의 비용이며, 아이에게 전달하고픈 유산의 물질적 값이다.

그보다 더 큰 것을 아이에게 가르칠 것은 없다.


김주원 작가(지담)는 ‘엄마의 유산’에서 말했다.


“네게 스며들게 하지 말고 네가 스며들게 하렴. 오로지 너 자체로서 너를 채우는 거야.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포장,

관습에 얽매인 낡은 사고,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꿈을 대신하고 있는 무지,

나아가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사고의 관성들...

그렇게 스며든 것들이 너를 채우게 하지 말고 네 것으로 채우고 흘러넘쳐 스며들게 하렴”(주 6)


그러기 위해선 엄마가 먼저 그 삶을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내야 한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건 내가 살아낸 삶뿐이니.

엄마의 언행이 아이의 언행이 된다는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니.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쓴다.


힘들고 설사 지금 당장에 돈이 되지 않을지라도, 정신적 유산을 남기기 위한 일을 계속해 나간다.

그게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한 길을 가다 보면,

아이도 아이로 살아가기 위한 길을 갈 것이라는 확신은 있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없다. 0원이다.

다만 내 정신의 사유, 사색에 고통이 조금 따를 뿐.

그러나 그냥 사는 대로 살다가, 어쩌다 보니 남의 삶을 살아 후회하는 고통은 더 클 것이니.

약간의 고통으로 더 큰 고통을 막는 법.


확신하는 교육법 하나는 부모가 작가가 되는 거다.

자신의 생각과 말을 정리할 줄 알아 글로 엮어내는 작가.

그러면 그 작가부모는 그 글대로 살아야 한다는 정신적 부채가 생긴다.


엄마의 유산 원저를 쓴 김주원 작가가 말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기억하는 바로는)


“엄마의 유산 책을 쓰고 나서, 그 책에서 아이에게 말한 대로 나부터 살고 있는지 매일 자기 점검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려고 한다”라고 말이다.


나도 그렇다.

그녀가 그랬듯, 이곳 브런치에 수많은 엄마아빠 작가들이 그렇듯,

그들의 글은 기록으로 남는다.

특히나 인쇄된 책은 빼도 박도 못하는 영원의 활자로 남는다.


아이가 어느 날 그 책을 들고 와,

“엄마아빠는 왜 이렇게 안 살았어? 왜 나한테 이렇게 살라고 몸소 보여주지 않았어?” 하면 뭐라고 할 것인가.

“너 그때 월 100~200만 원씩 들여 영어 배웠잖아. 수학 배웠잖아.” 할 것인가?


엄마와 아빠가

작가가 되면,

글을 쓰면,

책을 내면,


그건 가장 강력한 가성비의 교육이 될 것이다.


엄마가 작가가 되면, 아이도 자신만의 인생을 풀어내는 작가가 될 터이니.




주 1 : 장자크루소, 고백록, 민음사, 2004.

주 2 : Carl G. Jung, Aion: Researches into the Phenomenology of the Self, pp. 70–71.

주 3: 캠벨이 PBS 다큐멘터리 및 인터뷰 시리즈 The Power of Myth 중에 한 발언

주 4: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코리아, 2015.

주 5: 오스카 와일드,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스타북스, 2021.

주 6: 김주원, 엄마의 유산, 건율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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