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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요가를 하는가

by 카르멘

새해, 새달 2월.

새해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작년, 어느날과 똑같은 아침을 만났다.


아침기상이 유독 빨랐고,

나는 또 내가 원하지 않는, 비자발적인 미라클모닝(?)을 맞이했다.

내가 원하지 않는 태도로.

(아이에게 왜이렇게 일찍 일어나냐며 한숨쉬고 짜증내서 아이와 나의 아침을 스스로 망치는)


그놈의 태도.

그놈의 아침.

그놈의 아침의 태도.


이런 날이면, 나는 유독 요가가 하고 싶다.


내 미간의 주름만큼 접혀져있는 관절마다 숨 쉴 틈을 좀 주고,

답답한 명치를 좀 문질러대고,

다리미처럼 내 몸을 쫘악쫙 펴내고 싶다.


수리야나마스까라부터 사바사나까지

아무생각없이 수행하며

그냥 ‘요가 수행자’의 삶을 50분 동안 살아내고 싶다.


오롯이 몸만 움직이다보면

이내 마음이 따라올테니.

억지로 마음을 끌고갈 필요가 없을테니.

몸을 펴내다보면, 구겨서 던져버린 내 마음도 잠시나마 펴질테니까.


오로지 내 몸만 자유의지로 움직일 수 있음을 증명해내면

내 마음도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오늘의 킹콩맘은 (오늘아침 나는 진짜 킹콩맘이었다)

요가와 관련된 책을 골랐다.



<나는 왜 요가를 하는가?> 배런 뱁티스트 지음


01. 리시빙포즈(receiving pose)


자세를 취한 ‘다음’의 자세,


요가의 기본은 여러 개의 동작을 이어나가는 것이지만. 들숨과 날숨 사이의 모먼트가 있다, 잠시 숨이 멈추는 ‘잠시 멈춤’의 순간이 중요하다.

이게 바로 ‘리시빙포즈’ 다.


이때 호흡을 통해 신체에 치우친 나, 정신에 치우친 나 사이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다.


* 내 일상의 ‘리시빙포즈’ 모먼트는 언제일까.

내호흡을 고르는 시간.

그게 나는 출퇴근 시간인 것 같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출근을 하는 차안에서 내가 오늘 아침에 한일을 반추하고 빠진 것은 없는지 떠올려본다.

그리고, 오늘 회사에서의 공식 스케줄을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속해있지만 모르는 세상으로 진입하기 위해 라디오(손에 잡히는 경제)를 듣는다.

일부러 좋아하지 않는 세상의 목소리에 나를 노출시키며 관성화된 나의 호흡을 깨는 노력을 한다.


공과 사,

엄마와 개인인 나의 정체성 사이에 밸런스를 맞추는 ‘리시빙 포즈’는

그래서 내게 아마도 운전인 것 같다.


02. 진북정렬(true north alignment)


“움직임마다 신성한 계획에 따르려면 나침반의 바늘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몸, 마음, 호흡, 생명 에너지가 완전히 통합되어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상태. 그 상태가 진북정렬의 상태다.

진북은 북극성의 방향으로 언제나 변하지 않고 일정하다.

만약 내 에너지가 흐트러져 진북으로부터 멀어진 것을 알아차리면 다시금 스스로를 추슬러 정렬상태로 돌아가면 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을 바꾸는 강력한 요가수행이다.


“모든 배움은 원래 알았던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플라톤)


몇 천 시간의 요가와 수년간의 명상 끝에 나는 의외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바로 요가는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네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너는 이미 알고 있어. 그러니까 네 안에 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돼.’


요가는 ‘쌓아가는’ 수련이 아니라 ‘발굴하는 수련’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요가는, 영혼을 캐내기 위한 최고의 도구다.


*요가는, 영혼을 캐내기 위한 최고의 도구.

너무나 멋진 말이다.

내가 왜 힘이 들 때, 마음이 지칠 때, 더 이상 생각하는게 지긋지긋할 때 요가를 선택하는지 설명해주는 말.

내가 자꾸 답을 밖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기 때문이다.

혹은 나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때, 나는 요가를 통해 내 영혼을 캐내고 싶은지 모르겠다.

번민으로 길을 잃었을 때,

내가 가고자 하는 진북정렬이 어디인지 모르겠을 때, 아니 정확히는 알지만 외면하고싶을 때.


요가를 통해 잠시 길을 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03. 각자의 노자세


“모든 의식은 불복종 행동에서 비롯된다.”

(카를 융)


까마귀자세를 할 수 있나,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나, 일자 찢기가 되는가. 등을 묻기 전에

‘예스’의 에너지를 가질지 ‘노’의 에너지를 가질 지부터 결정하라.

‘예스’의 에너지를 갖는 것만으로 물구나무서기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예스의 마음가짐은 ‘지금 있는 곳’에서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하는데 필요한 행동을 격려해줄 것이다.

우리의 존엄성은 매트위에서나 매트 밖에서나 ‘노’라고 말할 수 있는 힘,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추구할 때 ‘예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에서 비롯된다.


당신의 내면의 나침반은 어느 곳을 가리키고 있는가.


요가에서든 인생에서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내면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요가 수련을 하면서 예스와 노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이때 예스의 긍정적 에너지는 근육과 몸의 움직임을 유연하고 부드럽게 하며, 마치 단단한 얼음이 따뜻한 햇볕에 녹듯이 불필요한 긴장과 초조함을 사라지게 한다.


요가 수련자에게는 각자의 ‘노 자세’가 있다.

자신이 꺼리는 자세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강사가 그 이름을 말하면 속으로 짜증 섞인 신음을 내뱉게 되는 동작.

‘으..하기 싫어’ ‘이자세는 난 못해’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동작.


요가수행자들이 즐겨하는 말 중에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강물은 언제나 흘러가 버리기 때문. 오늘의 몸, 오늘의 에너지, 모든 것이 오늘 처음 경험하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요가자세는 새로운 기회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좋아하지 않거나 원치 않는 것에 저항할 때가 많다. 단순하고 간단한 문제다.


저항을 그대로 두면 저항도 우리를 가만히 둘 것이다.

요가는 저항의 반대쪽에 무엇이 있는지를 안전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아사나는 우리가 지닌 더 큰 가능성을 알게 해주는 하나의 척도일 뿐.

여러분은 오늘 무엇에 ‘예스’인가.


*나는, 오늘 무엇에 ‘예스yes’인가, 무엇이 나의 ‘노no 자세’인가.


나는 오늘 아침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맞이하는 기상에 ‘노no 자세’를 갖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때에 눈을 뜨는 것만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에

아이가 깨는 순간부터 ‘no 자세’ 모드가 켜진 것이다.

‘으 하기 싫어’ ‘나는 못해’ 모드.


반면 나는 글을 쓰는 것에 ‘예스yes’이다.

부끄럽고, 반추하기 싫은 나의 반성과 같은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생각하기 싫고, 인정하기 싫은 나의 선택과 과오에 ‘저항’하고 싶었지만

저항의 반대쪽에는 포기만이 있음을 알기에,

나는 내일도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yes를 선택했다.

내일은 내일의 강물이 흐를것이므로.


04.프라나야마


호흡은 신체의 잠재력을 여는 열쇠다.

우짜이호흡이라는 게 있는데, 우짜이는 산스크리트어로 ‘승리’라는 뜻.

요가철학에서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에 온전히 헌신할 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본다.

우짜이 호흡은 수련에 반드시 필요한 ‘고요한 열정의 근원’이다.

화가 날 때 호흡, 두려움이 느껴질 때 호흡, 평온할 때 호흡. 모두 특정한 기운이 서려있다. 우리는 리시빙 포즈에서 이 호흡을 알아차려야한다.


프라나야마pranayama는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고 의도적으로 호흡에 변화를 주는 수련이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제어할 수 있으면 큰 전환점을 만들 수 있다.

리시빙 포즈를 하는 동안 호흡을 의식하면 집중력을 예리하게 갈고 닦을 수 있다.

매트위에서 길러진 이런 마음챙김의 기술은 일상생활에서도 실로 유용하다.


프라나_호흡에 들어있는 생명 에너지, 야마_무한한 확장.


*내 리시빙포즈 모먼트는 출퇴근 드라이빙길인데 프라나야마를 해야 하는 순간은 기상직후 혹은 기상직전이다.

간극이 너무 크다.

내호흡을 알아차리고 변화를 줘야 할때는 비자발적 이른 기상으로 화가 날때인데.

아무래도 몸을 일으키기 직전, 프라나야마를 해야겠다. 등발이 서늘한 새벽, 내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하는 아침의 순간, 내프라나야마가 on 모드가 되려면 아마도 내가 숨쉬는.모든 순간에 호흡의 의식적 훈련이 필요할 것 같다.


05. 드리시티


“햇빛이 사물을 태우려면 초점을 한 지점에 고정해야한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드리시티drishti는 산스크리트어로 ‘응시하다’는 뜻이다.

요가수련은 드리시티의 토대 위에서 행해지는 ‘움직이는 명상’이다.

눈에 힘을 빼고 지그시 한 지점을 바라보자.

힘주어 노려보면 안된다.

자세가 끝날 때까지 시선을 유지,

동작을 바꿔나갈 때마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긴다. 그러다보면 프라트야하라pratyahara, 감각의 에너지를 내면으로 모으는 일과 다라나dharana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기 수련이 완성된다.


드리시티는 몸을 정화해주는 열기인 타파스tapas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유리가 차가울 때 억지로 모양을 바꾸려들면 산산조각 나지만, 열로 유리를 녹이면 얼마든지 구부리고 형태를 잡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타파스도 우리의 몸과 저항에 유사한 결과를 가져온다. 몸도 저항도 뜨겁게 달구자. 그러면 부드러워질 것이다.


모든 요가자세의 목표는 열정과 냉정사이의 균형을 갖추는 것이다


그어떤 자세가 되었든 안달복달하지 않고 열심히 하고자 하는 열정과 자연스럽게 내려놓을 수 있는 냉정 사이의 균형과 여유를 찾는 일. 자기 몫의 수련을 찾아가는 일이다. 요가는 속도 대신 깊이를 선택하는 수련이다. 깊이를 잃으면, 요가는 몸매를 가꾸는 용도로 자세를 취하는 수준에 그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수련의 주체가 아닌 객체처럼 행동하게 된다. 타다아사나(산자세)를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활자세부터 수려하게 하려는 욕심이 그렇다.


삶에서든 수련에서든 지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솔직해지자. 은신처로 숨으면 안심이 될지 모르겠지만 삶의 핵심은 원래 불확실성에 있다. 삶의 모든 가능성과 대면하고 싶어 요가를 한다면 자신을 활짝 열어 놓는 데에서 오는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이제와서 말이지만, 내 브런치북의 주소가 drishiti다


06. 사마디


사마디samadhi. 치우침 없는 시각. 편견 없이 바라봄.

사마디는 우리의 경험을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된 백미러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얼룩 한 점 없이 투명한 렌즈로 바라보는 행위다.


행복하고 자유로운 경지. 완전한 자족의 상태. 충만한 행복의 경지. 그곳은 없다. 저 너머의 어딘가엔 없다. 여기가 바로 그곳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완전하고, 완벽하며, 아무 부족함이 없다. 당신의 집으로 돌아오라. 빈야사의 최고경지도, 최고속도도 당신을 축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마지막은 사바아사나.

여기가 바로 그곳, 지금이 바로 그순간, 지금 이모습이 나.

사바아사나의 세가지 핵심문구. ‘되기’가 아니라 ‘존재하기’의 공간을 확보하는 일.

그곳에서 고칠 것도 옮게 만들어야 할 것도 알아내야할 것도 없다.


*사바아시나는, 시체자세다.

마지막으로 매트 위에서 내호흡을 고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는 마지막 자세.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몸의 안과 밖 모두의 힘을 빼고 심지어 눈알과 혓바닥의 긴장까지 풀어내야 완성되는 마지막 경지.

바로 그순간, 그공간, 그 시공간의 나.

나는 그 시공간의 나를 만나기 위해 요가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도착한 매트위의 나를 눕히기 위해, 그 평화로운 사치의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요가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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