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에세이
세상에 이게 무슨 말이지 싶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런 전화상담을 받아본 적이 있다. 나는 호스피스 닥터다. 2003년 이 분야에 발을 들인 이후 마음도 몸도 현장을 떠난 적이 없으니 베테랑에 속한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들은 질문은 "호스피스가 뭐하는 데냐"는 거였다. "진통제나 주고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라는 편견과 싸워왔고, 지금도 이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우리 아들도 여섯살 때 내게 물었었다. "엄마, 호스피스가 뭐야?"하고... 한참 토마스와 친구들 기차놀이를 하던 녀석에게 무슨 설명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음... 많이 아픈 사람들에게 안 아프게 해주고, 아 이쁘다 해주는 거야"하고 설명했다. 녀석은 입을 가리고 킥킥 웃더니 다시 기차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둘째를 키우면서 나는 유심히 관찰을 했더랬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감각은 본능적으로 생기는 걸까?'라는 것이 궁금했다. “엄마, 내가 몇살이면 엄만 몇살이야?” 이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수가 커지는 게 재미났는지 "엄마, 내가 60세가 되면?" "네가 환갑되면 엄마아빠는 없을 거야" 이런 농담을 했더니 시무룩해져서 삐지는 거였다. 그걸 보고는 내심 누가 죽음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는데도, 영원한 이별이란 걸 아는구나 싶었다.
대철학자가 이렇게 탄식했다. 인간의 잘못된 믿음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착각이라고...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캠핑가서 떠오르는 해를 볼 때. 고요하고 장엄한 산봉우리와 계곡을 마주할 때. 끝없이 펼쳐지는 파도앞에서. 그 순간은 어떤 영화의 한 장면보다도 더 깊이 각인되고, 영원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 주체인 자신도 이대로 영원히 삶을 누릴 듯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현대 사회 그리고 아시아 문화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시되어왔다. 고대 그리스시대에도 “나쁜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 그것이 가까이 다가올지 모른다"는 설이 있었다. 심지어 전쟁의 패보를 전한 병사를 나쁜 소식의 원인이라고 여겨 목을 베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냉철히 생각해보면, 나쁜 것은 우리가 이야기하거나 하지 않든지 간에, 예정된 것이면 다가오고, 그렇지 않다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다가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미리 생각해두고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편이 낫지 않은가.
호스피스 강의를 해보면 20대의 의대생들도 조부모, 친척, 친구의 사고사 등 간접체험이 많았다. 여기에 반려동물을 떠나보내는 경우는 요새 정말 흔하다. 죽음은 상대방을 다시는 볼 수 없게 한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은 유족과 친지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호스피스는 죽음을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왠지 두렵고 무섭다"는 편견과 달리 내가 외래와 병동에서 만나는 분들은 지지체계가 좋고, 열린 의식을 가진 경우들이 많다.
내가 참여하는 동아시아 국제연구에 일본분들이 주축이 되어있어, 일어를 수년간 배웠다. 일본분들이 고양이를 많이 좋아한다. 일본어 원어민 선생님이, 딸이 친구의 고양이가 죽어간다고 조문을 간다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전화를 바꿔주었다. 딸은 한국어와 일본어의 바이링구얼이었지만, 나는 초면의 사람과 순전히 연습을 위해 일본어로 대화했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진 못했다.
하지만 요지는 이랬다. 되도록 평소와 다름없이 고양이를 대해주세요. 고양이가 지금까지 가족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려주세요. 덕분에 행복했다고, 넌 좋은 고양이였다고, 같이 해서 즐거웠다고 마음껏 이야기해주세요. 가능하면 사진도 찍고 간식도 나눠주세요. 네가 떠나더라도 우린 이 자리에서 네 몫까지 잘 살겠다고, 우리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세요. 이런 내용이었다...
그녀는 고마와했고, 후일담에 따르면 다같이 모여서 떠들썩하게 놀아주고 간식을 모아준 덕택에 고양이가 생기가 살아나 한달 여 더 살았다고 한다. SNS를 통해 알게 된 반려동물을 그리는 화가분도 알려드렸다. 그림으로 간직하고, 나중에 생각날 때마다 볼 수 있다면, 슬픔이 조금은 덜해질 것 같았다. "완벽한 고양이 호스피스네요."라고 그 가족분들이 감탄했었다. 동물이니까, 내가 조금 더 경쾌하게 접근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본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임종이 가까운 환자는 주위 가까운 사람들을 염려한다. 이때는 관계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영적인 시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 못다 한 업적이나 성취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질병의 하강곡선을 막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지가 않아서 말기로 접어든 것이다. 통증도 그렇지만, 불안이 상당한 시기이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지 모르는 불확실성.. 아무도 가 본 적이 없고, 누구도 같이 가 줄 수 없는 마지막 길...인간의 한계를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 호스피스 병동이다. 반면에 사소한 일상의 불평을 잠재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은 어제 돌아가신 말기 환자가 그렇게 살고 싶어했던 내일이다. 숨차 하는 환자분, 아무것도 드실 수 없는 환자분, 거의 침상에서만 지내야 하는 분들을 보면, 내가 아침을 먹었고, 자유롭게 숨쉬고 걸어다니는 것 자체가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30대, 40대 말기 환자분들을 보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큰 이득”이란 말에 겸허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죽음이라는 그림자는 삶에 꼭 붙어다니면서, 삶의 유한함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문구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역설적으로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과 쌍을 이루어 쓰인다.
웰다잉, 좋은 죽음...
한국형 죽음의 수용문화, 가족이 바탕이면서 개인을 중심에 둔 아시아형 의사소통 모델의 개발. 아직 우리가 갈 길은 한참 남아있다. 하지만 17년전과 지금은 다르다. 눈을 반짝이는 후학들이 있고, 웰다잉에 대해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린 마음들이 있다. 점점 나아지는 추세에 희망을 건다.